소공동체를 통한 새로운 본당 건설


 

 

 

    그리스도께서는 하늘나라(은총의 해)를 선포하시고 당신 자신을 모두 내어 놓으시는 희생과 봉사로 희년의 참 뜻인 해방과 구원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초대교회는 소공동체 생활을 통하여 희년의 정신인 나눔과 섬김의 삶을 철저히 실천하며 은총의 삶을 살았습니다.  따라서 소공동체 모임을 더욱 활성화 시킴으로 초대 교회를 본받고, 더욱 이상적인 새로운 본당을 건설해 나아가야 합니다.  모두 소공동체를 통하여 나눔과 섬김의 삶을 실천하며 소공동체를 통한 본당건설에 더욱 힘을 다하도록 하십시다.


1. 원래는 소공동체였습니다.

   성서는 소공동체와 같은 작은 그룹들안에서 형성되고 전승되었습니다. 출애급기의 12지파는 바로 소공동체를  의미합니다. ‘히브리’란 말의 뜻은 ‘하느님을 믿는 작은 무리들’이란 뜻이고, 이스라엘의 조직이 바로 12지파인 소공동체들의 연합이라는 뜻입니다. 히브리인들은 사람들을 집단화 시키고 계급적으로 나누어 분열시키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평등하고 자유로운 하느님의 백성이기 되도록 하기 위해서 소공동체들로 운영하였던 것입니다. 이 후 이스라엘은 소공동체의 모습에서 하나의 거대한 왕국으로 점차 비대해지고 집단화되어 갔고 이에 따라 예언자들은 끊임없이 출애급의 신앙 즉 소공동체로 돌아가 서로 평등한 하느님의 백성이 되기를 호소했습니다.

   예수님도 바빌론 유배 이후 깨어진 열두지파 체제(소공동체)의 부흥을 염두고 두고 제자들을 12명으로 모으 셨습니다.  유다 이스가리웃의 자리를 채우기 위하여 마티아가 자리를 선정된 사실을 보면, 초대 교회도 12제자단이 이루었던 소공동체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마르꼬, 마태오, 루가, 요한복음서도 개인의 창작품으로 볼 수 없습니다.  소공동체를 이루었던 신자들의 공동고백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사도행전은 첫 교회가 예루살렘에 모인 아주 작은 공동체였음을 얘기해 줍니다.  바오로 사도는 소아시아 각지를 다니면서 건설한 것은 바로 작은 공동체였습니다. 공동체 없이는 말씀이 전달될 수 있는 통로와 장소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원래 소공동체였던 우리 교회는 로마 제국으로부터 공인을 받고 국교가 된 후 교회는 작은 공동체의 전통을  점차 상실하게 되었고, 로마제국의 영향을 받아 제국주의적으로 집단화 되면서 신자들은 개별적으로 흩어진 채로 하느님 말씀을 듣고 섬겨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교회는 제도적으로는 강화되었지만 하느님 백성인 신자 개인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알아듣고 실천하는 정도는 떨어졌습니다. 결국 성서의 말씀은 전례적인 용어로 격하되고 있고, 신자 개인들이 말씀을 생활의 기준으로 삼지 못함에 따라 복음 정신이 점차 후퇴되어 있는 실정입니다. 성서 말씀은 케케묵은 고서가 아니라 바로 사람을 변화시키고 세상을 구원하는 생명의 말씀입니다.

   공동체는 ‘하느님과 신앙인 한 사람 한 사람의 거리를 좁히고 일치시키 주는 단체’입니다. 소공동체에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대단히 조중히 생각하는데, 이는 원래 하느님께서 사람들을 대하는 방법입니다. 집단화되고 비대화된 규모에서는 도저히 그런 분위기가 연출될 수 없는 것입니다.


2. 복음화 수단에 있어서 교회관의 변화

   세상을 복음화 시키는 일에 있어서 교회는 제도적인 모습에서 공동체적인 모습으로 건너가고 있습니다. 제도적인 교회의 모습에서는 신자들을  관리하는 있어서  주입식입니다.  아침기도, 저녁기도, 성사생활, 주일미사, 두번의 판공성사의 준수 여부로 신자생활을 척도합니다. 주일미사에 참여하고 일년에 두번 판공성사를 보면 적어도 냉담자 취급은 받지 않는다.  말씀을 얼마나 알고 실천하며 살아가는가 하는 것은 전혀 상관이 없고, 성직자가 가르치고, 죄를 용서해주고, 다스리는 권한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행사합니다. 이런 교회 구조에서는 신자들은 그저 가르쳐주면 배우고, 다스리면 다스림을 받고, 성화시켜 주면 성화되는 수동적인 역할 밖엔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교회의 모습은 교회의 단결과 결속력에는 그 힘이 대단하지만 세상을 복음화하는데 있어서는 무력하기만 해집니다.

공동체적인 교회의 모습 에서는 역사를 하느님의 나라로 변화시키기 위한 순례의 여정 속에서 다스리거나, 가르  치거나, 성화시키는 직분이 공동체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가 함께 나아가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성직자들의 고유한 직분은 그대로 존중되면서도 그것을 일방적으로가 아니라 상호적으로, 집단으로가 아니라 소공동체로 행해저야 하는 것입니다. 주입식 교회는 세상과 교회를 분리하여 영세하지 못하면 지옥에 가고 신앙을 얻는 목적은 다만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으로 가르침니다.  현세는 마치 귀양살이하는 것과 같아 죽어서 천당가는 일이 중요하고 죄 짓지 않은 것만 상책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공동체적인 모습의 교회는 이웃사랑을 더 강조한다. 봉사를 하더라도 소공동체 안에서 함께 행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3.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소공동체

   21번째 공의회는 ‘현대의 성령강림 사건’이라고도 불리웁니다. 이 공의회는 교회쇄신을 설정했고 초대교회   의 전통을 회복하고저 노력했습니다. 초대교회의 전통을 회복한다는 말은 바로 교회의 원래의 모습이었던 공동체성을 회복하고 사도직을 부흥시킨다는 뜻입니다. 공의회는 교히를 ‘하느님의 백성’이라고 정의 했습니다. 그리고 교황 혼자 온 세상의 교회를 통치하던 구조에서 주교들의 사도단으로서의 지위를 강조했고 더불어 평신도 사도직을 강조했습니다. 사도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증인들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하셨던 일 즉 하느님 나라를 세우는 일을 계속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공의회 이전에는 사도직을 성직자나 수도자들이 하는 것으로만 이해하였습니다.  공의회가 끝난지 3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아직 이 경향은 뚜럿합니다. 평신도 사도직을 강조하는 성직자도, 자각하는 평신도들도 부족합니다.  따라서 교회의 공동체성을 회복하고 사도직을 부흥하고자 했던 제2차 바타칸 공의회의 쇄신정신을 실현하기 위하여 30년이 지난 오늘 날 결론으로 제시된 것이 바로 소공동체 운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4. 소공동체의 역사

   바타칸 공의회의 결론으로 채택된 것이 아니지만, 비슷한 시기에 성령께서는 남미의 무지한 백성들을 통하여  소공동체들의 바람을 불러 일으키셨습니다. 공의회에 참석했던 라틴 아메리카 주교들이 자기 교구에 돌아서 보니까 자발적인 작은 공동체들이 생기고 있었고, 그것이 차츰 대륙 전체에 퍼지고 마침내 바티칸에까지 전해진 것입니다. 교황 바오로 6세는 1975년 세계 가톨릭 교회의 최우수 사목정책으로 소공동체를 채택하셨습니다.


5. 소공동체 본질

   소공동체 운동은 발원지인 라틴 아메리카는 물론이고 아프리카, 아시아 그리고 유럽 등 현재 전세계에 전개  되고 있습니다. 지금 한국에서 도입한 소공동체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룸코에서 온 것으로 거기에 세워진 사목연수센타에서 거의 20년이상 소공동체 지도자들을 연수시키면서 개발되고 실험되고 정착된 프로그램이다. 다시 말해서 사도행전 2장과 4장에 나오는 초대 교회 공동체의 생활에 대한 말씀을 아프리카라고 하는 지역적 상활과 현대라고 하는 시대적 상황 속에 토착화시킨 모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소공동체의 본질의 첫째 요소는 집에서 모이는 것입니다..

   제도주의적이고 주입식인 교회의 특징은 성당에서만 모이는 것이다. 성당에 가면 성직자의 전문적이고 주도적인 역할만이 두드러질 뿐 평신도가 할 일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당에 가지 말아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성사생활은 본당에서 하되 공동체의 자리는 지역이라는 것으로 집에서 평신도들이 주측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당에서는 성직자나 수도자의 사정에 맞게끔 사목활동이 조정되지만 집에서는 신자들의 사정에 따라 시간과 내용이 맞추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본당에서는 성직자, 수도자들의 여건에 맞는 산자들만 찾아 오지만 소공동체는 보편적이고 모든 신자들이 참여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집에서 모이게 되면 그런 한계를 넘어설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소공동체의 본질의 두번째 요소는 복음 나누기입니다.

   이는 성서공부와는 다르다. 성서공부는 올바로 알자는 지식이 주가 되고 지성이 요구됩니다. 그러이 복음 나누기는 들리는 그대로, 읽는 그대로의 느낌을 강조하기 때문에 지성보다는 감성이 더 요구됩니다. 성서공부는 혼자서 하거나 단체에서 하거나 이론적으로 정리하는 조직화 과정을 필요로 하지만 복음 나누기는 그럴 필요가 없다는데 강점이 있습니다.  아이들도, 할머니도, 학생도 누구나 다 복음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수준을 최대한 낮춘 것으로 보다 대중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성서공부가 필요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겨냥하는 사목 목표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복음 나누기가 중요한 이유는 소공동체의 핵심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현존 체험입니다. 그래서 모임 때에는 주님을 상징하는 촛불을 켜거나, 주님이 오실 자리라고 해서 빈의자를 놓기도 한다.  그리고 기도로 주님을 초대합니다.  주님께서는 “단 두세 명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나도 함께 있겠다”고(마태18,18) 약속하셨습니다.  우리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살아 계심을 믿기 때문에, 우리의 보잘 것 없는 모임에도 함께 하시리라 믿음을 표하면서 성서에 관한 깊은 지식이 없어도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성령의 손길이 마음을 움직여 주실 것을 믿는 것이다.


소공동체의 본질의 세번째 요소는 말씀을 실천하고 봉사하게 하는 일입니다..

   성서공부에서는 주제 파악을 해야하고 줄거리와 배경을 알아야 되지만 복음 나누기에서는 어느 것이 중요하다는 법이 없습니다. 루가복음의 말르타와 마리아의 이야기가 텍스트로 주어졌다면 어떤 사람에게는 마르타의 ‘경화이 없었다’는 말이, 또 다른 이에게는 ‘필요한 것은 한가지 분’이라는 말이, 또 다른 이는 ‘발치에 마리아가 앉아 있었다’는 말이 마음에 더 와닿을 수 있는 것입니다. 지적으로 중요성을 따지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 더 마음에 와 닿는가가 더 중요합니다.  그렇게 해서 지적으로만 성경을 대할 때 오는 폐단을 방지하자는 것입니다. 자기 마음에 와 닿은 복음말씀을 나눔으로써 겨냥하는 사목 목표는 그것을 가지고 행동하게 하는 것, 이웃에게 봉사하게 하는 것, 말씀에 따라서 그대로 살게 하는 것입니다.  성서공부는 아는 것으로 그치고 생활이나 활동에 꼭 반영해야 한다는 의무를 강조하지 않고 그저 기대할 뿐이지만, 복음 나누기에서는 말씀과 삶을 바로 연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소공동체의 본질의 네번째 요소는 보편교회와 일치하기 위해 본당과 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6. 소공동체의 사도직

    이제 소공동체가 수행하게 될 사도직에 대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

 1)소공동체는 이웃에게 공동체를 형성시켜주는 활동을 하게 됩니다.

    소공동체 모임은 복음 나누기를 통하여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현존을 느끼게 해줍니다. 주님의 현존을 체험

     만 할 수 있다면 비록 그 것이 한 사람에 불과 하더라도 씨앗이 뿌려진  것이나 마찬가지이기에 그 공동체

    는 성장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현존 체험이 안되었다면 더 노력을 하거나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체험을

    바탕으로 하는 점이 이제까지의 구역 모임과 다른 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2)소공동체는 서로 나누며 살아가게 됩니다.

    물질이 아니더라도, 돈을 들이지 않고도 더 귀한 것을 나눌 수 있습니다.  시간입니다.  그러나 많은 시간을

    나누기 위해서는 많은 관심을 서로 가져야 합니다.  재능을 나눌 수  도 있습니다.  우리는 관념적으로가

    아니라 아주 작은 봉사라 하더라도 소공동체 안에서  서로 자발적으로 주고 받음으로써 부활하신 그리스도

    의 현존 체험을 성장시켜가야 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공동체 바깥에 있는 도움이 필요한 이웃들에게

    도 봉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3)소공동체는 사회를 복음화 시키게 됩니다.

    공의회 이전에는 복음화라 하면 비신자를 신자로 만드는 것이었고 전교한다는 것은 영세 시킨다는 의미였

    습니다. 그리고 본당이 설정되면 그 본당에 모여든 신자들에 대한 일이 본당의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러나 공의회는 복음화란 그리스도를 모르는이에게 그리스도를 알리는 것뿐 아니라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

    는 가치관을 복음화하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가치관이 복음화 되지 않으면 신자가 된다 하여도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사회의 구조와 가치관을 복음화 시키는 일을 소공동체의 사도직이 겨냥해야 할 주요목표로

    삼게 됩니다.


결론

    이제 시켜서 하는 시대는 지났습니다.  성직자들만 반성할 문제가 아니고 평신도들도 각성해야 할 문제입

    니다. 우리가 참으로 신앙이 귀한 줄 여긴다면 신앙을 지키고 증거해야 합니다. 신앙의 바탕이 바로 사랑의

    생활이기에 신앙을 절대 혼자서 유지할 수 없고 공동체를 꼭 이루어야 합니다.  지금까지는 공동체가 없어

    도 신앙생활이 가능했던 아주 기형적인 분위기였지만 지금의 시대는 신앙인이 존재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공동체가 꼭 필요한 것입니다.  그 공동체의 형태가 어떠해야 되는지는 대단히 자유로운 것이고 지역적, 문

    화적, 생활양식에 따라 적응해야 하는 문제입니다.  이제 우리 모두 고정관념을 버려야 합니다.  지금까지

    혼자서만 신앙생활을 했던 사람들이라면 이제부터는 가능한 한 어떤 형태이든지 소공동체를 이루어야 합

    니다.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자기 신앙을 위해서입니다.  바로 이런 눈만 뜨이면 하느님이 우리를 당

    신 도구르 쓰시려고 이끄시는 손길을 천지에 널려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것이 소공동체의 핵심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현존을 깨닫고 체험하

    고 거기에 따라서 사도직으로 증거한다면 신앙생활의 보람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신앙의 신비는 남을 사

    랑해야 내가 사랑 받고, 다른 사람이 구원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어야 내가 구원된다는 역설적인 것입니다.

    내가 여유가 있고 시간이 있을 때 신앙생활을 하겠다고 하면 죽을 때까지 못하는 법입니다.  나도 문제가 많

    고 부족하지만 나보다 더 어려운, 더 모르는, 더 딱한 사람들에게 뭔가 내가 할 수 있는 봉사를 하다 보니까

    내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신앙의 신비입니다.  모두 이웃과 공동체를 형성하는 일에 정성을 솓으며 소공동

    체 생활을 통하여 더욱 기쁘고 살아있는 믿음의 생활을 누리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