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30주일 - 나해

 

1독서  예레미아 31, 7-9

 

1.    예레미야(Jeremiah) 예언자: '야훼께서 일으키신다'란 뜻이다. 눈물의 예언자.

-      4대 대 예언자 중 둘 째로 위대한 예언자(이사야-예레미아-에제키엘-다니엘)

-      645년경 출생. 이사야 보다 백년 후

-      남쪽의 유다 왕국의 아나토트 성읍 사제 집안(아나돗의 제사장) 출신

-      스바니아, 나흠, 하바쿡과 동시대인.

 

2.    소명

-   626년 예언자로 불리움을 받음(19)

-   하느님의 명확한 명령으로 독신 생활(예레 16,2).

-   유다 왕국의 붕괴 시점에 소명을 받음

-   40년 이상  이 소명에 충실( 586년 예루살렘 함락 이후까지 예언직 수행 )

-   예루살렘 함락 후 이집트로 강제로 이주. 그기서  우상숭배를  거슬려 예언.

-   결국 반대자들에게 돌로 쳐죽임을 당했다, 혹은 굶어 죽었다.

 

3.    내용

-      예언자로 불리움을 받은 자신의 소명을 설명

-      계약에 대한 잘 못된 개념을 지적

-      계약에 대한 불충실성의 결과로 유다 왕국의 몰락을 경고

-      하느님은 계약을 매우 진지하게 생각하시는 재판관이심을 강조

-      북쪽과 남쪽 왕국들의 회복에 대한 예언을 계속

 

4.    오늘 1독서: 이스라엘의 재건과 새로운 탈출(귀환)을 예고하는 말씀이다.

-      남은자들: 이스라엘 왕국의 멸망(기원전721) 후 유배를 통하여 정화되었던 소수 무리

-      이들은 나약한 사람들로 구성: 병자들, 임신부들, 출산부들로 구성

-      귀환은 이집트에서의 탈출 보다 훨씬 쉽고 가벼운 행진이 될 것이다.

-      에프라임(Ephraim): 요셉의 두 번째 아들. 야곱이 요셉이 에집트에서 낳은 두 아들을 자신의 아들로 삼고  첫 째 아들 므나쎄(Manasseh) 대신 에프라임을 축복(창세기 48 1-22)

-      축복의 경로: 노아 아사악 야곱 에프라임(보통 두 번째 아들이 맏아들보다 더 의롭다)

 

 

 복음: 마르코 10,46-52

 

마르코 복음: 그리스도론과 제자의 신분에 대한 가르침들

-      예수님은 고통을 겪으시 죽으셔야 한다.  그리고 사흘 안에 부활하실 것이다.

-      제자는 지상의 모든 장애물들을 버려야  한다. 전적으로 하느님께 의존해야 한다.

-      겸손한 제자는 그의 봉사에 대하여 박해를 포함하여 지상의 보상들을 받을 것이다.

-      박해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준비로 그의 영을 단련하는 것을 도와 준다.

 

1.            1. 오늘 복음은 눈이 먼 바르티매오의 치유 이야기

-      마르코 8,22-26에서는 이름 없는 눈 먼 소경이 예수님께 치유받고 차차 회복된다.

         -   오늘 바르티매오는 적극적으로 예수님을 찿았고 즉시 치유가 된다.

         -   오늘 이야기는 치유 이야기이지만 또 하나의 소명 이야기이기도 하다.

         -   바르티매오는 즉시 제자가 되어 그분을 따른다.  제자들의 깨닫지 못함과 분

              별없음과 좋은  대조

 

2.            2. 내용

-      예리코(Jerich): 예루살렘 북동쪽 15마일 지점에 요르단 강으로부터 서쪽5마일 지점에 있다.   카이사리아 필리피에서 출발하시어 지금 예루살렘을 향하고 계신 중이다.

-      티매오의 아들 바르티매오: 마르코가 환자의 이름을 밝힌 것은 드문 일.

바르티매오는 큰 번영의 지위에서 몰락하여 가장 비참한 상태(구걸)에 놓여 있었던 인물

-      다윗의 자손: 나탄이 다윗에게 한 약속의 상속자(2사무 7,12-16; 1역대 17,11-14)

   오늘 바르티매오에 의하여 첫 번째로 공개적으로 이 호칭이 예수님께 적용된다.

   더러운 영이 아닌 한 인간에 의한 예수님의 참된 정체성에 대한 첫 인식이기도

   하다.

-      겉옷을 벗어 던지고: 긴 옷 혹은 동냥을 위해 펼쳐 놓았던 천일 수 있다. 새로운(세례의 표징) 것을 입기 위하여 옛 질서를 걷어치운다는 암시일 수도 있다.

-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야고보와 요한에게 하셨던 똑 같은 말씀이다.

      그들은 영예의 자리들을 요청했지만, 바르티매오 이미 예수님의 왕적 권위   

      의   본질을 보고있다.

  -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믿음은 예수님의 본질적 요구에 대한 필수적 선행 조건이다. 부활 이전에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하느님 위격을 의미하지는 못했다. 하느님의 구하시

      는 힘이 예수님 안에,  예수님을 통하여 행사되고 있음을 믿는 것이다. 독단적

      인 자신의 이기적 욕구을 포기하고  예수님에 의하여 선포되는 하느님의 치유

      의 말씀을 믿고 받아들임을 의미한다.

-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셨다: 실지로 바로티매오는 예수님의 뒤를 따라갔다. 예수님의 추종자들을 예수님의 여행에 동행하였다. 바르티매오는 예수님의 수난 경험에도 참여하였을 것으로 본다. 그는 이미 영적인 그리고 육체적인 치유를 받아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았기 때문.

 

우리도 바르티매오처럼 예수님을 다음과 같이 따르도록 하자.

우리의 몸값을 위하여 당신을 봉헌하고, 우리의 성찬례 음식으로서 당신을 받아들이고

우리의 끝없는 엄청난 커다란 보상으로 당신을 기다리도록 하자.(히포의 성 아우구스티노)

 

2독서: 히브리 5, 1-6

 

1. 신약성경의 순서

-      율법서(복음서)  - 역사서(사도행전) - 지혜서(바오로.야고보. 베드로. 요한. 유다가 쓴 저서들) -   예언서(요한 묵시록)   * 책의 길이에 의해 순서가 정해짐.

2.    히브리서

-      바오로의 서간문들 이후에 그리고 베드로의 서간문들 이전에 위치하고 있다. 길이 때문에

-      저자는 아직 모른다.  교황청은  최근(1914)까지 바오로가 썼다고 결정하지 않고 있다.

3.    히브리서의 기본 가르침

-      유다교에 대한 그리스도교 신앙의 우수함을 보여주는데 중점을 두고 있다.

-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천사들보다 위대하시다.

-      그리스도는 모세보다 위대 한 분이시다.

-      그리스도는 위대한 대사제이시다. 멜키세덱의 품계 사제직이시다.

-      이는 아론과 그로부터 내려오는 레위 사제직보다 위대하다.

 

4.    멜키세덱의 품계 사제직이란?

멜키세덱은 누구? : 탈쿰(구약바빌론 유배(기원전 586) 이후 사용했던 아람어 번역들) 에서는 멜키세덱이 노아의 맏아들 셈이라고 분명히 확인하고 있다. 멜키세덱은 셈의 옥좌 이름이다. 부족사회(추장?)

창세기 14,17-18:

아브람이 크로클라오메르와 그와 연합한 임금들을 치고 돌아오자, 소돔 임금이 사웨 골짜기 곧 임금 골짜기로 그를 마중 나왔다. 살렘 임금 멜키체덱도 빵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다.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사제였다.

 노아는 아브라함 이전에 오랜 세월을 살았다. 홍수 이후엔 노아와 그 후손들 뿐이다.

아브라함의 가계는 노아의 맏배 셈으로부터 추적하고 있다(창세 11,10-26).

결국 계산해 보면 셈이 600년 살았고, 175년을 살았던 아브라함보다 35년을 더 살았다.

그 당시 사람들이 그렇게 오래 살았는지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성경 저자가 셈( 멜키세덱)과 아브라함이 연결되어 있음을 독자들이 볼 수 있기를 원하고 있다는 점이다.

? 가족의 사제직분을 품계 추적 때문이다.

하느님이 노아를 축복( 9,1) – 노아가 셈을 축복( 9,26) – 멜키세덱이 아브람을 축복( 14,19) – 이사악이 야곱을 축복.  이것이 멜케체덱 품계의 사제직분이다.

5.    대사제의 임무

-      우리 죄 때문에 예물과 제물을 바치는 일. 예수님은 대사제로 천상에서 제물들을  바치고 계신다.

-      나약함은 바로 현세욕이다.  이 때문에 모두가 죄인이다. 사제도 죄인. 속죄일에 대사제는 지성소에 들어가기 전에 백성의 죄들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죄들을 위한 속죄 제물을 봉헌.

-      레위 사제직: 25세에 실습 30세에 서품 50세에 사직

-      (즉 멜키세덱) 400년 이상 축복을 가지고 있었다.

-      축복이 수여되고 나면 아버지는 죽을 때까지 그 가족의 원로로 남지만 축복을 받은 자가 가족의 안녕을 위한 책임을 지게 됨.

-      예수님은 레위 대사제직이 아니고 멜키체덱과 마찬가지로 성부의 축복을 통한 대사제이시다.  금송아지 사건 후에 레위 사제직이 생겼다.

 

 

연중 제 30 주일

 

 제 1독서 - 예레미아 31,7-9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의 네 명의 위대한 예언자들 중에서 두 번째로 등급이 정해진 예언자이었는데, 예언자 스바니야, 나훔 및 하바쿡과 동시대인이었다. 그는 기원전 645년경에 태어났는데, 이것은 예언자 이사야보다 거의 백년 뒤이다. 그는, 남쪽의 유다 왕국에 위치한, 예루살렘의 북동쪽 4.8km정도에 위치한 성읍인, 아나토트에 있는 사제 집안 출신이었다.

 

하느님께서는 그를 기원전 626년에 예언자가 되라고 부르셨는데, 이 시기에 그는 19세였다. 그는, 독신주의를 관대하게 받아들여, 하느님의 명확한 명령에 의하여 독신으로 지냈다. 유다 왕국이 붕괴하려고 하는 시점에 하느님의소명이 그에게 왔다. 비록 그는 조용한 가족적 삶과 작은 성읍의 우정을 선호하였으나, 그는 하느님께서 그의 마음에 이미 내려놓으신 의향들을 억누르고 있을 수 없음을 깨달았다. 죽음에 이르기까지, 40년 이상의 기간 동안 그는 자신의 소명에 충실하게 머물러 있었으며 기원전 586년에 예루살렘의 함락 이후까지 예언을 하였다. 예루살렘이 함락되었을 때에, 그는 그의 동료 유다 왕국 사람들에 의하여 이집트로 강제로 보내졌다. 이집트에서, 예레미야는 우상을 숭배하는 유다인들에 반하여 예언하였으며, 그리고 아마도 곧바로 그 이후에, 그의 비난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들 같은 사람들에 의하여, 돌에 맞아 죽었거나 혹은 굶어 죽었다.

 

예레미야의 책은 예언자가 되라고 하는 그의 소명에 대하여 말하고 있으며 그리고 오판하였던 계약들과 깨뜨려버렸던 계약들의 결과로 유다 왕국의 몰락을 열거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독자들에게 하느님께서는 계약을 매우 진지하게 생각하시는 공정한 재판관이심을 상기시킨다. 그러고 나서 그는 북쪽과 남쪽 왕국들의 회복에 대하여 예언하는 것을 계속한다. 오늘 우리의 제1독서는 이스라엘의 재건과 새로운 탈출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7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 예언자는 누구의 메시지를 그가 전달하는지를 모든 사람이 알기를 원한다. 예레미야는 이 구를 132번 사용한다.

 

“야곱에게 기쁨으로 환호하고 민족들의 으뜸에게 환성을 올려라. 이렇게 외치며 찬양하여라. ‘주님, 당신 백성과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을 구원하소서!’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에게 구원을 이미 수여하셨다.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은 북쪽의 이스라엘의 왕국이 아시리아 군대에 의하여 기원전 721년에 정복당하였을 때에 위험에서 벗어났으며 그리고, 자신들의 하느님께 충실한 새로운 이스라엘을 구성하기 위하여 자신들의 유배를 통하여 정화되었던, 적은 숫자의 사람들을 말한다.

 

8 내가 이제 그들을 북녘 땅에서 데려오고 땅 끝에서 모아들이리라.

 

땅 끝은 북녘 땅과 동의어인데, 거기에 이들은 포로로 붙잡혀 있었다.

 

 

그들 가운데에는 눈먼 이와 다리 저는 이 아이를 밴 여인과 아이를 낳는 여인도 함께 있으리라. 그들이 큰 무리를 지어 이곳으로 돌아오리라.

 

이 무리는, 이 사건의 기적적인 속성에 대한 표징인, 나약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

 

9 그들은 울면서 오리니

기뻐하며 돌아오는 것에 대한 대조이다.

 

내가 그들을 위로하며 이끌어 주리라. 물이 있는 시냇가를 걷게 하고

  이집트로부터의 첫 이주의 ‘바위’ 사건들에 대한 암시이나 그러나 이제 이 물은 지속적으로 흐른다.

 

넘어지지 않도록 곧은길을 걷게 하리라.

 

첫 이주와는 대조적으로 얼마나 행진이 쉬울 것인지를 두드러지게 한다.

 

나는 이스라엘의 아버지가 되었고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의 아버지 되심이라는 개념은 구약 성경에 드문드문 있다. 이 구절은 이들의 계약 관계를 정의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이스라엘은 반드시 북쪽 왕국일 필요는 없으며, 이집트로부터의 첫 이주를 한 백성에 의하여 형성되었던 원래의 한 개의 왕국을 말한다.

 

에프라임은 나의 맏아들이기 때문이다.

에프라임은 요셉의 두 번째 아들이었는데, 이 아들에게 이스라엘은 나이 많은 형인 므나쎄 대신에 축복을 내렸다. 이 축복은, 노아로부터 셈에게, 이사악으로부터 야곱에게, 그리고 이제 야곱으로부터 에프라임에게로, 추적될 수 있다. 비록 축복은 히브리 전통에 의하여 맏아들에게 내려갔지만, 하느님 백성의 역사에 있어 두 번째 아들이 맏아들보다 더 의롭다는 것이 보통 증명되었으며 그리고 축복을 받았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눈에 띄는 예외들은 셈과 아브라함이다.

 

제 2 독서 - 히브리 5,1-6

우리가 히브리서에 대한 우리의 학습을 계속함에 따라 신약 성경에 있어 이 책의 위치를 살펴보도록 하자. 신약 성경 서간들은 율법서들 및 역사서 이후에 그리고 예언서 이전에 위치해 있다. 이 지혜서들은 저자에 의하여 더욱 더 나누어져 있으며, 그리고 각 저자 안에서 길이에 의하여 가장 긴 것이 처음에 나타난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알려져 있지 않다. 1914년 정도의 최근에 이르기까지 성 바오로가 이 서간의 저자임을 교회가 결정하지 않았음을 교황청 성서 위원회는 재확인하였다. 바로 이것이 왜 이 독서가 말씀 전례 중에 단지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지로부터’로 단순히 선포되는 이유이다. 이 책은 신약 성경에서 바오로의 서간문들 이후에 그리고 베드로의 서간문들 이전에 위치하고 있는데, 아마도 그 길이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히브리서의 기본 가르침은 유다교에 대한 그리스도교 신앙의 우수함을 보이는데에 중심을 두고 있다. 이 논증은 다음의 세 단계들로 발전된다.

1) 육화하신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비록 모범으로써 우리들을 이끄시기 위하여 천사들보다 낮게 되셨지만, 천사들보다 위대하신 분이시다.

2) 그리스도께서는 모세보다 위대하시다. 이것은 개신교의 성공회 신자들과 루터파 신자들이 2주 전에 들었던 독서이다.

3)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위대한 대사제이시다. 당신의 사제직분은 멜키체덱의 품계으로부터인데, 이것은, 레위 사제직분이 유래하는, 아론의 사제직분보다 상급이다.

 

누가 이 멜키체덱인가?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바를 통하여 그에 대하여 아는 것이 매우 적으나 그러나 유다교의 탈굼과 다른 저술들은 유다교 전통이 그를 노아의 맏아들인 셈으로 확인하는 것을 매우 분명하게 하고 있다. 멜키체덱은 그의 옥좌 이름이다.

 

“아브람이 크도를라오메르와 그와 연합한 임금들을 치고 돌아오자, 소돔 임금이 사웨 골짜기 곧 임금 골짜기로 그를 마중 나왔다. 살렘 임금 멜키체덱도 빵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다.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사제였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노아는 아브라함 이전에 오랜 세월을 살았다. 결국에, 대홍수 이후에 이 세상에 다시 사람을 살게 하였던 사람들은 노아와 그의 후손들이었으며 그리고 아브라함이 살고 있던 시기에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있다. 창세기 11,10-26을 몇 분 동안 살펴보도록 하자. 이 구절은 아브라함의 가계를 노아의 맏배 아들인 셈으로부터 추적하고 있다. 이 구절로부터, 만약에 우리가 계산을 하면, 우리는 셈이 600년 동안 살았음을 알게 되며, 그리고 사실은, 175년을 살았던 아브라함보다 35년 더 오래 살았음을 알게 된다. 그러면 그 당시에 사람들이 그렇게 오래 살았던 것일까? 우리는 알지 못하나, 그러나 성스러운 저자는 우리가 셈-멜키체덱 그리고 아브라함 사이의 연결을 볼 수 있기를 확실히 원하고 있다.

왜 이 연결이 중요할까? 왜냐하면 이것은 이 가족의 사제직분을 추적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성경을 통하여 축복을 따라감에 따라 우리는 창세기 9,1에서 노아가 하느님에 의하여 축복을 받았으며 그리고 창세기 9,26에서 셈이 노아에 의하여 축복을 받았음을 발견하게 된다. 축복에 대한 그 다음 언급은 창세기 14,19에 있는데 거기서 아브람이 멜케체덱에 의하여 축복을 받게 된다. 이후에, 이사악이 축복을 받게 되고 그러고 나서 이사악은 이 축복을 마치 그가 의도하였던 바처럼, 에사우 대신에 야곱에게 준다. 그러나 이사악은 자신이 기만당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에, 이사악은 에사우에게 이 축복은 거두어들일 수 없음을 말하며 그리고 이 사제 수품의 결과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 애야, 나는 그를 너의지배자로 세웠고, 그의 모든 형제들을 그에게 종으로 주었으며, 곡식과 술을 그에게 마련해 주었다. 그러니 내 아들아,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줄 수 있겠느냐?” 이것이 이 가족의 사제직분인, 멜키체덱 품계의 사제직이다.

 

1 모든 대사제는 사람들 가운데에서 뽑혀 사람들을 위하여 하느님을 섬기는 일을 하도록 지정된 사람입니다. 곧 죄 때문에 예물과 제물을 바치는 것입니다.

 이것이 대사제의 임무이다. 예수님께서는, 대사제로서, 우리를 위하여 천상에서 이들 제물들을 바치고 계신다. 일부 주석자들은 ‘선물들’은 곡식 제물들을 말하는 반면에 ‘제물들’은 동물 봉헌들을 말하는 것이라고 추측하였는데, 이 추측은 잘못된 추측일 것이다. 제 9장이 보여주듯이, 속죄일 의식은, 이 서간의 저자가 주로 관심을 가지고 있는, 구약 성경 의식이다. 이것은 이 백성의 죄들을 위한 속죄이지. 개인의 죄를 위한 속죄가 아니다.

 

2 그는 자기도 약점을 짊어지고 있으므로, 무지하여 길을 벗어난 이들을

희생 제물의 속죄로서도 불가능한 유일한 죄들은 민수기 15,30에 고의로 짓게 된 죄들로서 명시된 죄들이다. 이 죄들은, 인간의 나약함을 통하여 그 속으로 사람이 ‘떨어졌던’ 죄들이라기 보다는, 계획적으로 저질러진 죄들을 말할 것이다.

 

너그러이 대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너그러이 대하다’로 번역된 그리스어 단어는 성경 안의 다른 어디에서도 나타나지 않는다. 이 표현은 격정과 감정의 결여 사이의 적절한 평균을 나타내는 용어이다.

 

3 그리고 연약한 탓에 백성의 죄뿐만 아니라 자기의 죄 때문에도 제물을 바쳐야 합니다.

나약함에 의하여 시달림을 당하는 것이 현세욕이다. 이 나약함은 죄로 이끈다. 사제를 포함하여, 모든 사람은 죄인이다. 속죄일에, 대사제는 지성소에 들어가기 전에, 이 백성의 죄들뿐만이 아니라 그 자신의 죄들을 위한 속죄 제물을 봉헌하였다.

 

4 이 영예는 어느 누구도 스스로 얻는 것이 아니라, 아론과 같이 하느님에게서 부르심을 받아 얻는 것입니다. 5 이처럼 그리스도께서도 대사제가 되는 영광을 스스로 차지하신 것이 아니라, 그분께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 하고 말씀하신 분께서 그렇게 해 주신 것입니다. 6 또 다른 곳에서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 너는 멜키체덱과 같이 영원한 사제다.”

 창세기 14,18과 시편 110,4. 25세에 자신들의 도제살이를 시작하였고, 30세에 서품되었으며, 그리고 50세에 사직할 것이 요청되었던 레위 사제들과는 달리, 셈- 멜키체덱은 아브라함에게 축복을 주기 전에 축복을 400년 이상 가지고 있었다. 일단 축복이 수여되고 나면, 아버지는 그가 죽을 때까지 그 가족의 원로로서 자신의 지위에 머물러 있었으나, 그러나 축복을 받았던 자는 그 가족의 안녕을 위한 책임을 지게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레위 대사제가 아니고, 멜키체덱과 마찬가지로, 당신의 성부의 축복을 통한 금송아지 사건 이전의 대사제이시다. 예수님께서는 금송아지 사건 이전의 사제이시므로, 당신께서는 자신의 가계를 입증하지 않으셔도 되며 당신의 사제직분의 행사에 있어 시간 제약을 받지 않으신다. 우리는 다음 주, 즉 나해 연중 제31주일 제2독서 입문에서 멜키체덱에 대하여 더 들여다 볼 것이다.

 

 

복음 - 마르코 10,46-52

지난주에 우리는 그리스도론과 제자의 신분에 대한 예수님의 세 번째 가르침을 들었다. 이들 세 개의 가르침들은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요약될 수 있다.

1) 예수님께서는 고통을 겪으시고 죽으셔야 하며 그리고 사흘 안에 부활하실 것이다.

2) 제자는 지상의 모든 장애물들을 버려야하며 전적으로 하느님께 의존하여야만 한다. 어린이와 같이 신뢰하고 봉사하라.

3) 겸손한 제자는 그의 봉사에 대하여, 박해를 포함하여, 지상의 보상들을 받을 것이다. 박해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준비에 있어 그의 영을 단련하는 것을 도와줄 것이다.

 

이번 주에 우리는 눈이 먼 바르티매오의 치유에 대하여 듣는다. 마르코 복음서 8,22-26에서 이름이 없는 눈이 먼 사람이 예수님께 데려져 왔는데, 그의 시력이 점진적으로 회복되었으며, 그리고 그에 대한 치유를 비밀로 하라고 말해졌다. 오늘의 이야기에서, 마르티매오는 적극적으로 예수님을 찾았기에, 그는 즉시 치유가 되며, 그리고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서는 제자가 된다. 복음사가 마르코가 그의 수난 주일 묘사를 시작하기 전의 마지막 이야기인 이 두 번째 이야기는 신아에 있어 약간의 진척을 예시하고 있다. 이것은 하나의 치유 이야기인 만큼이나 또한 하나의 소명 이야기이기도 하다. 예수님에 대한 바르키매오의 반응과 제자의 신분이 되는 과정에 당신을 기꺼이 따르고자 하는 그의 마음은 이 여행 동안에 제자들의 바르게 이해하지 못함과 분별없음과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다.

 

46 그들은 예리코에 들어갔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많은 군중과 더불어 예리코를 떠나실 때에,

예리코는 예루살렘의 북동쪽 24km지점에 있으며 요르단 강으로부터 서쪽으로 9km지점에 있다. 카이사리아 필리피에서 시작하였던 이 여행은 예루살렘에 있는 목적지를 향하고 있는 중이다.

 

티메오의 아들 바르티매오라는 눈먼 거지가 길가에 앉아 있다가,

바르티매오는 아람어 형식이며, ‘티매오의 아들’이란 설명은 이 아람어 단어의 그리스어 번역이다. 복음사가 마르코가 치유될 사람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드문 일이다.

“복음사가 마르코는 마르티매오의 이름과 그의 아버지의 이름 둘 다를 기록하였는데, 이것은 주님에 의하여 행해졌던 많은 치유의 경우들 모두에 있어 거의 있지 않은 상황이다. 따라서, 티매오의 아들인 이 바르티매오가 어떤 커다란 번영의 지위에서 몰락했다는 것에 대해서는 별로 의심할 바가 없으며, 그리고 이제 그가 가장 나쁘게 소문난 그리고 가장 두드러진 비참함의 대상으로 간주되고 있는데, 이는, 그가 눈이 먼 것뿐만이 아니라, 또한 앉아서 구걸을 하여야 하였기 때문이다.”

 

47 나자렛 사람 예수님이라는 소리를 듣고, “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하고 외치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첫 번째로 공개적으로 ‘다윗의 자손’이라는 메시아의 호칭을 예수님께 적용한 것이다. 이것은 또한 더러운 영이 아닌 한 인간에 의한 예수님의 참된 정체성에 대한 첫 인식이다. ‘다윗의 자손’이라는 호칭은 예수님을, 예언자 나탄을 통하여 다윗에게 주어졌던, 약속의 상속자로서 나타낸다.

 

48 그래서 많은 이가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마르코 복음서 3,12와 8,30에서, 예수님께서는 침묵을 명하셨으나, 그러나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바르티매오의 이 환호에 대한 불만을 전혀 보이지 않으신다.

 

그는 더욱 큰 소리로

 이환호를 강조하고 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49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불러오너라.” 하셨다. 사람들이 그를 부르며, “용기를 내어 일어나게 예수님께서 당신을 부르시네.” 하고 말하였다. 50 그는 겉옷을 벗어 던지고

 이 겉옷은 긴 웃옷일 수도 있으나 동냥을 거두어들이기 위하여 펼쳐 놓았던 천일 수도 있다. 이 구절은 바르티매오가 새로운 것을 입기 위하여 옛 질서를 걷어치우는 것에 대한 암시일 수도 있다.

 

벌떡 일어나 예수님께 갔다. 51 예수님께서 “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하고 물으시자.

예수님의 이 질문은 야고보와 요한에게 주어졌던 것과 꼭 같다. 영예의 자리들을 차지하기 위한 그들의 요청은 바르티매오의 겸손한 요청과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다. 이 눈이 먼 사람은 이미 영적 치유를 받았으며 그리고, 봉사하기 위하여 자세를 낮춘, 예수님의 왕적 권위의 본질을 ‘보고 있다.’

 

그 눈먼 이가 “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였다. 52 예수님께서 그에게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하고 이르시니,

 믿음은 기적과 예수님의 가르침의 본질적 요구에 대한 필수적인 선행 조건이다. 그러나 부활 사건 이전에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행위가 하느님 위격을 의미하였을 수는 없다. 예수님의 사목 기간 중에 이러한 행위는, 하느님의 구하시는 힘이 예수님 안에서 그리고 예수님을 통하여 행사되어지고 있는, 바로 그 하느님을 향한 독단적인 자신의 이기적 욕구에 대한 포기와 함께, 예수님에 의하여 선포되는 하느님의 치유의 말씀에 대한 수용성을 뜻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가 곧 다시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섰다.

 그는 실제로 당신의 뒤를 따라갔다. 추종자는 예수님의 여행에 예수님과 동행하였다. 바르티매오는 아마도 예수님의 수난 경험에도 또한 참여하였을 것인데, 이는 그가 이미 영적인 그리고 육체적인 치유를 받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의 귀감으로서 예수님을 다음과 같이 따르도록 하자: 우리의 몸값을 위하여 당신을 봉헌하고, 우리의 성찬례 음식으로서 당신을 받아들이고 그리고 우리의 끝없는 그리고 엄청난 커다란 보상으로서 당신을 기다리도록 하자.”

 

 

3분 복음/교리 묵상

405. 사회 안에서 권위는 어떤 기초 위에 서 있는가?

1897-1902, 1918-1920

인간의 모든 공동체에는 질서를 지켜 주고 공동선에 이바지하는 합당한 권위가 있어야 한다. 이 권위는 하느님께서 세워 주신 것이므로 그 근거는 인간의 본성에 있다.

 

406. 권위는 언제 합법적으로 행사되는가?

1901

권위는 공동선을 추구하고, 또한 공동선을 달성하려고 도덕적으로 합당한 방법들을 사용해야 비로소 정당하게 행사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치 체제들은 시민들의 자유로운 결단에 따라 채택되어야 하고, 또 사람들의 독단적 의사가 아니라 법에 따라 다스려지는 ‘법치 국가’의 원리들을 존중하여야 한다. 옳지 못한 법률과 윤리 질서에 어긋나는 조치들은 양심을 구속하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