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 제3주일 다해

 

입문

지난 2주 동안 우리는 이 세상 마지막 시기에 모든 일의 판관으로서 주님의 오심에 대하여 들었다. 비록 오늘 ‘기쁨의 일요일’에 미사 집전 사제가 분홍(장미색) 제의를 입지만, 대림시기 동안에 집전 사제는 회개의 색깔인 자색 제의를 착용한다. 우리가 하느님과의 계약으로부터 멀어져 어둠()의 작용에 참여하고 있음을 스스로 깨닫게 하기 위한 목적이다. 빛과 어둠이 함께 뒤섞여 있는 모습들이 대림 시기 전반에 걸쳐  독서들안에 들어 있다. 우리의 커다란 기대, 즉 우리의 꿈들을 현실과 비교시킴으로  우리는 회개의 느낌을 가지게 된다. 무엇이 지금 우리의 꿈들을 실현할 수 없게 만들고 있는 것일까? 무엇이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자유를 추구하는 것을 방해하고 있을까? 모르는 것들에 대한 두려움과 위험들을 감수할 걱정은 흔히 우리를 그 동안의 구습의 노예로 머물게 하고, 또 우리가 새로운 것들을 성취하는 것을 방해한다. 우리의 욕심과 소유욕은 우리가 가진 것을 버리고 그 결과로 다음 단계의 삶을 추구하게 되는 것을 방해한다. 만약에 우리가 두려움, 부당함, 빈곤, 부정, 그리고 질병에 대한 걱정들을 그냥 다 놓아버리고 당신께서 우리를 인도하여 주심을 단순하게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하느님께서는 이러한 것들의 노예가 되어있는 우리를 자유롭게 해 주실 것이다.

 

기쁨의 일요일인 오늘은, 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 이전의 전례력에 대한 기록에 보면, 대림 시기의 절반을 보냈고, 또 성탄이 곧 다가오기에 특별한 기쁨의 날로 간주되었다. 라틴어인 Graudete는 영어로 Rejoice로 널리 번역되는데 이 단어는 필리피 4,4-5로부터 발췌된, 대림 3주째인 오늘의 미사 중 입당송에 사용되는 첫 번째 단어이다.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여라. 거듭 말하니,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가까이 오셨도다

 

[이번 주의 독서들은  MAD Magazine의 표지에 있는 우스꽝스럽게 보이는 케릭터인, Alfred E. Newman을 상기 시키는데, 이 자의 별명은 “뭐라고, 내가 걱정한다고? "였다. Alfred는 차분하고, 조용하며, 근심이 없는 자이다. 필리피인들이(오늘2독서), 만약  별명을 가졌다면, 그것은 아마 ”내가 걱정을 한다고? 그래 틀림없이 맞다! "를 나타내는 별명을 가졌을 것이다.

 

필리피인들은 걱정을 하지만 Alfred E. Newman 형의 사람들은 걱정을 하지 않는다. 어째서일까? Alfred E. Newman형의 사람들은 걱정을 하지 않는데 이는 그들이 관심이 없고, 떨어져 있으며, 그리고 냉소적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연루되는 것을, 투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투자한다는 것은, 어떤 것의 성공을 믿고 하는 행위란 뜻이다. 투자는 걱정을  틀림없이 유발시키는데, 모든 계획이 성공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투자를 하지 않으면 근심도 없다'는 것은, 한 개의 간단한 방정식이다.

 

필리피인들 유형의 사람들은 Alfred E. Newman 유형의 사람들과는 정반대이다. 필리피인들은 크게 걱정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노후 계획들에 있어, 자신들의 자녀들에 있어, 생명 보험에 있어, 대형 투자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부분, 그들의 가장 큰 투자는 유다주의에 있다. 신앙심 좋은 유다인으로서, 필리피인들은, 이스라엘을 해방시키고 평화와 정의로써 민족들을 다스리실, 메시아의 오심에 깊숙이 투자하였던 것이다. 복음사가 루카가 오늘의 복음 말씀에서 “ 백성은 기대에 차 있었으므로, 모두 마음속으로 요한이 메시아가 아닐까 학 생각하였다.”라고 설명하듯이(루카3,15). 필리피인들은 메시아를 너무 많이 주시하고 있기에 세례자 요한과 같은 황야의 히피를 “그 분!"으로 잘못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계속하여 ”....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오신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루카 13,16)라고 하면서 그들을 물리셨다. 이것이 걱정, 즉 거룩한 걱정이 아니면 무엇이 걱정일까? 우리들은 이러한 경험을 약간은 하였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걱정이란, 약속된 분이 오셔서 하느님 나라를 예고하실 때에 그 날이 올 것임을 진지하게 믿고 있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 있어, 약간의 걱정은 좋은 것이다!][1994년 대림 제3주일을 위한 Liturgical Press Sunday Bulletins으로부터 발췌함].

 

  1독서 - 스바니야 3, 14-18

 

다해 대림 첫 두 주일 제1독서들의 주제는 이번 주일의 예언서인 스바니야서로부터의 발췌로 계속되고 있다. “ 바로 그날" 하느님의 백성은 재건될것이다. ” 주 너의 하느님께서 네 한가운데에 계신다."

 

14 딸 시온아, 환성을 올려라. 이스라엘아, 크게 소리쳐라. 딸 예루살렘아, 마음껏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시온은 예루살렘의 다른 이름이다. 도시가 시온 산과, 성전이 지어진, 모리야 위에 건설되었음을 상기하라.

책의 나머지는 장차 오게 옹호의 날에 대한 격언들로 이루어져 있다(3,8 3,11). 구절은 이들 기쁨의 암시들에 대한 시작 부분이다. 기뻐하라는 요청은, 원군이 포위 공격을 풀어버림 따라, 승리에, 패배로부터의 탈출에, 배경을 가지고 있다.

 

15 주님께서 너에게 내리신 판결을 거두시고 너의 원수들을 쫓아내셨다. 이스라엘 임금 주님께서 네 한가운데에 계시니 다시는 네가 불행을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구절에서, 주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위하여 옹호자로서 이미 개입하셨다. 시편 46 48장에서, 예루살렘 가운데에 계신 주님의 현존은 공격적인 도움이라기보다는 방어적인 도움을 제공하고 있다.

 

16 그날에 사람들이 예루살렘에게 말하리라. “ 시온아, 두려워하지 마라.

표현은 신탁에 있어 구원하고자 하는 주님의 현존에 대한 보증을 일반적으로 수반한다(2열왕 6,16, 1역대 22,13 보라).

 

힘없이 손을 늘어뜨리지 마라. 17 주 너의 하느님, 승리의 용사께서 네 한가운데에 계시다. 그분께서 너를 두고 기뻐하며 즐거워하신다. 당신 사랑으로 너를 새롭게 해 주시고 너 때문에 환성을 올리며 기뻐하시리라. 18축제의 날인 양 그렇게 하시리라.

  백성이 주님을 신뢰하여 왔기에, 당신께서는 기뻐하신다. 구절은 시작 (14) 대조를 이루고 있는데, 거기서 백성은 기뻐할 것을 요청받고 있다. 지금은 커다란 기대의 시기이며 오늘의 화답송은, 다음과 같이, 기쁨이라는 주제를 계속하고 있는데 이는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화답송 - 이사야 12,2-3.4ㄴㄷ . 5-6( 6)

 ◎ 소리 높여 환호하여라. 너희 가운데에 계시는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은

     위대하시도다.

  "보라, 하느님은 나의 구원. 신뢰하기에 나는 두려워하지 않노라. 주님은 나의         ,   나의 굳셈. 나에게 구원이 되어 주셨도다. 너희는 기뻐하며 구원의 샘에        물을  길으리라.

 

 ◎ 소리 높여 환호하여라. 너희 가운데에 계시는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은    

    위대하시도다.

 ○“주님을 찬송하여라. 이름을 받들어 불러라. 업적을 민족들에게 알리         ,   이름 높으심을 선포하여라.

 

 ◎소리 높여 환호하여라. 너희 가운데에 계시는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은

   위대하시도다.

○“위엄을 이루셨으니 주님께 찬미 노래 불러라. 이를 세상에 알려라. 시온          주민들아, 소리 높여 환호하여라. 너희 가운데에 계시는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은  위대하시도다.

 

◎소리 높여 환호하여라. 너희 가운데에 계시는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은

   위대하시도다.

 

2독서 - 필리피 4,4-7 43)

 

지난 주일에 우리는 필리피인들에게 보낸 서간의 시작 부분으로부터 들었는데, 오늘 우리는 이 서간의 마지막 부분으로 이동한다. 성 바오로는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기대 안에서 살고 있는 이 사람들을 위한 가르침들로써 자신의 편지를 끝낸다.

 

4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5 여러분의 너그러운 마음을 모든 사람이 알 수 있게 하십시오. 주님께서 가까이 오셨습니다.

구절은 초기 교회의 환호 기도문인 marana tha[마리나 ! , 오십시오. 예수님](코린토 16,22, 요한 묵시록 22,20) 생각나게 한다.44)

기뻐함은 슬픔으로부터 분리할 없는데, 이는 진실로 기뻐함이 오히려 슬픔과 깊숙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신 고유의 잘못된 행위를 크게 슬퍼하며 이를 고백하는 자는 기쁨에 차게 된다. 기존의 방식과는 전혀 다르게 자신 고유의 죄들에 대하여 슬퍼하나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기뻐하는 것은 가능하다. .... 때문에 그는 ‘주님 안에서 기뻐하십시오. 라고 말한다. 이는 만약에 그대가 기뻐할 가치가 있는 생명을 이미 받았다면 이것은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가 스스로 이것을 반복하여 말하는 것은 옳다. 이는, 일들이란 본래 고통을 주기에, 모든 경우들에 있어, 우리가 기뻐하여야함을 그가 분명하게 밝히는 것이 바로 반복을 통하여서이기 때문이다. [ 요한 크리소스토모(Saint John Chrysostom, 398-404), 398-404), Homilies on the Epistle to the Philippians, 15,4,4-7].

 

6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이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7 그러면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

인간 마음의 이해하는 능력을 넘어서 혹은 우리가 이해할 있는 이상을 성취하심으로써(에페소 3,20 보라).

“하느님의 평화가 우리에게 왔을 때에 비로소 우리는 하느님을 이해할 것이다. 그때에는 아무런 불협화음도 없을 것이고, 불일치도 없을 것이며, 걸핏하면 싸우려는 논쟁들도 없을 것이고, 의문에 속하는 어떠한 것도 없을 것이다. 이것은 세상의 삶에서는 거의 그러하지 않다. 그러나 우리가 하느님의 평화를 가지게 되면 그러할 것인데, 평화 안에서 모든 이해는 우리의 것일 것이다. 이는 평화란 이미 휴식의 상태(rest)이며, 이미 안전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마리우스 빅토리누스(Marius Victorinus, 355년경), Epistle to the Philippians, 4,7].

 

복음 - 루카 3,10-18

세례자 요한에 대한 이야기가 지난 주일 부터 계속되고 있다. 세례자 요한은 찾아 오는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주고 있으며 자신이 메시아가 아님을 말하고 있다. 그는, 앞으로 오실, 자기보다 뛰어난 분을 가리키고 있다. 오늘의 복음 말씀에서는, 기꺼이 회개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종교 지도자들이 아니라 오히려 보통의 유다인 사람들임을 말하고 있고, 세리들과 군인들처럼 유다인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임을 말하고 있다. 이들은 예수님의 설교에 긍정적으로 반응했던 바로 그 사람들이다.

   

10 군중이 그에게 물었다. “ 그러면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질문은 셰리들에 의하여(12) 그리고 군사들에 의하여(14) 반복되고 있다. 질문은 루카 복음서 10,25 18,18에서 나타나는데 거기서 어떤 율법 교사와 권력자는 각각 예수님께 영원한 생명을 상속받기 위하여 그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다른 대답들을 듣게 된다. 사도행전에 있어서는 질문이 나타나며 경우에 있어 그리스도교의 세례가 대답의 부분이다(사도행전 2,37; 16,30; 22,10).

11 요한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나누어 주어라.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

 세례자 요한은 동물 희생 제물들의 봉헌 혹은 단식과 같은 행위들의 실천을 요청하지 않는다. 그는 근본적인 것을, 혜택 받지 못한 자신의 형제자매들에 대한 사심없는 관심을 요청한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께서 가르치실 바인 물질적 재산의 적절한 사용에 대하여 미리 가르치고 있다. 자신들의 옷가지의 반을 나누는 사람들은 자캐오같은 사람들인데, 자캐오는 자신이 소유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놓는다(루카 복음서 19,8).

 

 12 세리들도 세례를 받으러 와서

 세리들은 유다인들과 이방인들로부터 멸시를 받았다. 이들이 세례를 받기 위하여 세례자 요한에게 오는 것은 충격이었다. 이들이 윤리를 심각하게 받아들인다는 것이 기대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되풀이하여 루카 복음서에서 통상의 예상들과 깊숙이 자리 잡은 편견들이 뒤집어진다.

그에게, “스승님,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하자, 13 요한은 그들에게 “ 정해진 것보다 더 요구하지 마라.”하고 일렀다.

로마의 조세 제도는 부패했고, (로마 제국의 황제인)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이를 제거하려 노력하였다. 세리들은 세금에다, 이에 더하여 자신들이 거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거두어들였는데, 거두어들인 것들도 모두가 이자였다.

14 군사들도 그에게 “ 저희는 또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묻자,

군사들은 유다인 남자들로서 헤로데 안티파스를 섬기는 자들로 보인다. 45) 그들은 로마 제국의 의지를 로마의 속국 안에서 집행하는 것을 도왔기 때문에, 그들은 또한 멸시를 받았다.  기대들에 대한 반전과 멸시 받는 자들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라는 루카 복음서의 주제들의 구현들로서, 그들은 세례를 받기 위하여 스스로 나선다.

요한은 그들에게 “ 아무도 강탈하거나 갈취하지 말고 너희 봉급으로 만족하여라.” 하고 일렀다. 15 백성은 기대에 차 있었으므로, 모두 마음속으로 요한이 메시아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였다.

복음사가 루카의 주석은, 이스라엘의 재건과 하느님의 권능과 통치를 위하여 파견된 하느님의 기름부음 받으신 중개자이신, 메시아의 오심을 기다렸던 팔레스티나 출신 유다인들이 있었음을 뜻한다.

 

16 그래서 요한은 모든 사람에게 말하였다.

  구절은 예수님의 사명의 보편성( 강조하고 있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준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보다 못하다. 세례자 요한은 물이라는 정화 매체를 사용하나, 예수님께서는 성령과 불이라는 물보다 우수한 정화와 단련 매체들을 사용하실 것이다. 사도행전 12장에서 복음사가 루카는 성령의 불이 어떻게 인간들에게 작용을 완수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오신다.

비록 구절이 예수님에 대하여 분명히 언급하고 있기는 하나, 구절의 정확한 의미는 알기 어렵다. 예수님께서는 악의 힘들을 물리침에 있어 세례자 요한보다 힘이 있으시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심지어 노예의 일을 수행하는 데에도 적합하지 않다.(또한 같은 주제/본문을 위한 사도행전 13,25 보라.)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17 또 손에 키를 드시고 당신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치우시어, 알곡은 당신의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리실 것이다.

알곡은 쭉정이로부터 까불림에 의하여 분리되었다. 밀과 알곡 껍질들의 혼합물은 ‘까부르는 부채’’에 의하여 공중으로 던져졌으며 거기서 쭉정이는 멀리 날려가게 되어 결과 알곡만 남게 것이다. 그러면 알곡은 탈곡장 위의 부엌 안으로 쓸어서      넣어지게 것이다. 사실에서 문간 밑바닥을 가로지르는 방책을 나타내기 위한 ‘문지방'이라는 용어가 유래한다. 여기서의 묘사는 열매를 맺지 않는 자들로부터 열매를 맺는 자들을 분리하는 모습에 해당한다.

 

18 요한은 그 밖에도 여러 가지로 권고하면서 백성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였다.

복음사가 루카의 관점에 있어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 사이에는 너무 많은 유사점들이 있기에 루카는 세례자 요한이 구원이라는 새로운 시대를 개시하자마자 기쁜 소식을 가르친다고 말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