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7주일 - 다해

 

 

 

제1 독서  사무엘 상  26:2,7-9,12-13,22-23

 

   사무엘기 상, 하권, 그리고 열왕기 상, 하권은 불가다 성경에서는 1-4 열왕기이다.  이는 칠십인역 번역본과 그리스 성경의 분류법에 따른 것이다.  불가다 성경에서 이들을 역사서에 넣은 것이다.  히브리 성경에는 사무엘기 상권과 하권을 ‘후기 예언자들‘ 안에 넣고있다.  그러나 불가다 새 번역서는 사무엘기 상,하권과  열왕기 상,하권을 따로 분리하여 역사서 안에 넣고 있음을 보여준다.

 

   히브리 전통은 그의 죽음이 묘사된 사무엘 상권 25장까지는 사무엘 예언자 자신이 기록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나머지 부분과 사무엘기 하권 모두는 다른 두 예언자 즉 가드와 나단이 쓴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몇 학자들은 사무엘 상권의 첫 부분도 사무엘 생존시의 사건이 아니고 다른 시대의 사건들임을 들어 사무엘이 기록했다는데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어떤 학자들은 에즈라가 다윗왕조 초기부터 말기까지 150년간의 시대를 관찰하기 위하여 사무엘서 원본과 다윗 왕 시대의 여러 가지 기록들을 이용하여 사무엘서 1장에서 25장까지를 기록했다고 생각한다.

 

   사무엘기 상, 하권을 기록한 목적은 이스라엘 왕국 건립에 대한 역사 제공과 다윗 왕권의 정착에 있다.  마지막 판관으로 여겨지는 사무엘은 이스라엘의 통일을 위해 선택된 인물이다.  하느님은 사무엘을 이용하여 이스라엘의 첫 째 왕 사울을 세우셨다.

 

   사무엘기 상, 하권은 네 부분과 부록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첫 부분(사무엘 상권, 1-7) : 사무엘의 경이로운 탄생과 성전에서의 양육에 대한 것이다.

       둘 째 부분(사무엘 상권,8-15) : 왕국의 건립이 묘사되고 사울이 왕으로 축성 받는 내용이다.

       셋 째 부분(사무엘 상권, 16-사무엘 하권,1) : 사울과 다윗과의 관계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 오늘의 독서는 바로 이 셋 째 부분의 이야기이다. -

      네번째 부분(사무엘 하권, 2-20) : 다윗 이야기를 중심으로 한다: 내란, 언약궤의 예루살렘 이동,

          메시아적 약속 즉 영원한 왕권이 다윗의 혈통에서 이어지리라는 언약과 다윗의 간음, 회개와

          죽음등 다윗을 중심으로 이야기 하고 있다.

       부록 : 사무엘 하권, 21-24

   오늘 독서의 배경은 사무엘이 하느님의 지시대로 사울을 축성하고 백성들이 이를 확인하는 것이다. 그러나 얼마 후에 사울은 하느님께 불복종하였고,  하느님은 그를 내치시고 , 사무엘을 시켜 다윗을 축성하도록 하셨다. 사울은 그의 질투로 인해 온 갖 방법으로 다윗을 죽이려 했고,  다윗은 사울의 추격을 받으며 도망가야 했다. 사울은 삼천 명의 군사를 가지고 있었으나 다윗의 군사는 약 육백 명에 불과했다.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 했지만, 다윗은 결코 보복하지 않는다.

 

사울은 지프 광야에 내려갔다.

이 지역은 사해 윗 쪽의 산간 동쪽 비탈지역이다.
 

다윗은 이스라엘에서 뽑은 부하 삼천 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다윗이 있는 지프로 찾아 갔다. 다윗은 아비사이를 데리고

다윗의 여동생의 세 아들중의 하나이다.(신명기 전 2: 16), 다윗의 조카이다.


밤을 타서 군대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그때 사울은 진지 안에서 머리맡 땅바닥에 창을 꽃아 놓고 잠들어 있었다. 아브네르와 그의 군사들도 사울을 둘러싸고 잠들어 있었다. 아비사이가 다윗에게 말하였다. "하느님께서 오늘 원수를 장군님 손에 넘기셨으니, 이 창으로 그를 단번에 땅에 박아 놓겠습니다. 두 번 찌를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아비사이를 타일렀다. "그분을 해쳐서는 안 된다. 누가 감히 주님의 기름부음 받은 이에게 손을 대고도 벌받지 않을 수 있겠느냐?"

사울은 그를 죽이려 하나 다윗은 “하느님의 축성 받은 자”로 존경하고 자신의 왕으로 극진히 모신다.
 

다윗은 사울의 머리맡에서 창과 물병만 가져갔다.

특별히 이 표현은 머리맡의 창과 물병을 가져갈 만큼 가까이 접근한 사실을 말하고 있다.


하느님께서 그들 위에 깊은 잠을 쏟으시어 그들이 모두 잠들어 있었기 때문에 다윗을 본 사람도 알아채거나 잠을 깬 사람도 없었다.

가까이 접근하여 창과 물병을 가져갈 만큼 가까이 접근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하느님의 개입하시고 계시기 때문이었다.


다윗은 반대쪽으로 건너가서 상대와 거리를 멀리 두고 산꼭대기에 서서 네르의 아들 아브네르와

아브네르는 사무엘 군대의 사령관이다.(사무엘 상권 14:50)


군대에게 응답하였다.
“여기에 임금님의 창이 있습니다. 젊은이 하나가 건너와 가져가게 하십시오. 주님은 누구에게나 그 의로움과 진실을 되갚아 주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주님께서 임금님을 제 손에 넘겨주셨지만, 저는 주님의기름부음받은이에게 손을 대려 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의 충정은 사울을 헤칠 수 있었던 그 순간에도 나타나고 있다. 다음 구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기를 “내 아들 다윗아, 너는 축복을 받으리라; 너는 위대한 일을 하게 될 것이며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 그리고 다윗은 자기 갈 길로 가고 사울은 그의 집으로 돌아갔다. 이 이야기는 사무엘 상권 24에서 나오는 이야기, 즉 사울이 굴속으로 들어갔고 다윗이 그의 겉옷을 잘랐다는 이야기와 중복된다고 많은 주석자들에 의하여 믿고 있다.

 

제2독서  1 코린토 15:45-49

   지난주 코린토 1서를 공부하면서 성 바오로가 부활의 실제를 의심하는 몇 몇 코린토 인들에게 부활을 설명하는 것을 들었다.  성 바오로는 “만약 죽은 후 부활이 없으면 우리의 믿음은 헛된 것이다”라고 말씀 하셨다.

   성 바오로는 동반되는 두 가지 의문을 다루고 있다.  곧 부활한 육체는 어떤 형태이며(1 Corinthians 15-44a), 부활한 육체의 실존을 생각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오늘의 독서).  이에 대한 답변으로 바오로 사도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첫째 질문 즉 '부활한 육체의 형태가 어떤 것이냐'하는 문제를 식물과 동물, 광물질의 차원으로 비교 한다:  밀알이 썩어서 식물이 되는데 그 형태는 하느님이 정하신다.  하느님은 모든 동물에게 몸을 주셨고 그들의 환경에 적응 하도록 만들어 놓으셨다.  해와 달, 별들이 각기 다른 밝기를 가지게 하신 것처럼 하느님은 부활한 육체의 모습들을 정하신다.

   이제 우리는 둘째 질문에 대한 답을 듣는다: "무슨 이유로 부활한 육체가 실지로 존재한다고 생각하는가?“


성서에도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 인간 아담이 생명체가 되었다.”

이것은 창세기 2: 7절과 관련이 있다. 곧 하느님은 아담을 흙으로 만들어 그에게 숨을 불어넣어 생명을 부여 하셨다. 아담은 육체를 지닌 존재가 되었다. 오늘 여기 모인 우리 모두처럼!


마지막 아담은 생명을 주는 영이 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살아있는 영이시다. 그 분은 살기를 원하는 사람은 모두 살려주시는 살아 있는 영이시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 여라;
       그리고 너 자신처럼 네 이웃을 사랑하여라. 그러면 너는 영원히 살 것이다.“(Luke 10:27-28)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을 것이 다.“
       (John 5:24)

      "나를 먹는 사람은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John 6:57)

      "이제 조금만 있으면 세상은 나를 보지 못하겠지만 너희는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John 14:19)


그러나 먼저 있었던 것은 영적인 것이 아니라 물질적인 것이었습니다. 영적인 것은 그 다음입니다. 첫 인간은 땅에서 나와 흙으로 된 사람입니다. 둘째 인간은 하늘에서 왔습니다. 흙으로 된 그 사람이 그러하면 흙으로 된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늘에 속한 그 분께서 그러하시면 하늘에 속한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흙으로 된 그 사람의 모습을 지녔듯이 하늘에 속한 그분 모습도 지니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지상적 육체는 아담의 모습을 본받게 되었다.


하늘에 속한 그분의 모습도 지니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천상적(영적)인 육체는 둘째 사람인 그리스도를 본받게 되었다. 왜 우리가 그러한 몸을 지녔다고 믿는가? 그것은 예수님이 우리이게 말씀 하셨고 그것을 우리가 믿기 때문이다. “죽은 이들이 하느님 아들의 목소리를 듣고 또 그렇게 들은 이들이 살아날 때가 오는데 지금이 바로 그 때이다.”(John 5:25) 그분은 이를 증명하기 위하여 죽고 부활 하셨다.

     “이는 우리가 흙의 아담과 같이 부패하는 육체를 가지고 태어났으며, 또한 우리는 그리스도와 같이
      썩지 않는 몸을 가지게 된다는 의미이다.” [The Ambrosiaster (between A.D. 366-384),

 

복음  루카 6:27-38

   지난주 우리는 예수님의 평지 설교에서 네 가지의 행복과 네 가지의 불행에 대하여 들었다.  마지막 불행은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하면, 너희는 불행하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거짓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 말을 듣고 있는 너희에게 내가 말한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고 계신 것 같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 해 주고.

이 말은 22절과 연관이 있다: "사람들이 너를 미워하고 쫓아 내고 모욕하며 중상모략 할 때 너는 축복 받을 것이다."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을 축복하고 너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여라. 누가 너의 뺨을 때리면 다른 쪽 뺨을 내밀어 주어라.

이는 육체적 박해를 의미하는 것 같다. 마태오 5:39 에서는 좀 더 법적이고 언어적인 행동으로 이해된다.


너의 겉옷을 가져가는 사람에게 너의 속옷까지도 가져가게 내버려 두어라.

겉옷은 속옷보다 더 값진 것이다. 겉옷은 야외에서 잠자리용으로 쓰여 진다. 겉옷은 특별히 값진 것 이였다.(신명기 24:10-13)


너에게 달라고 하는 자 누구에게나 주고 네 것을 가져가는 이에게는 되찾으려 하지 마라. 남이 나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황금률이다. 이 황금률의 출처는 예수님께 있지 않다. ; 토빗 4: 15에서는 이 말을 부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예수님은 최상의 생활방식을 제공하시면서 제자들이 그렇게 살아주기를 기대하고 계신다.


만약 너희가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은 사랑한다.

성 마태오는 이 죄인들을 세리들과 이방인이라 규정하지만, 루카 사도는 좀 더 세련된 표현을 한다.


너희가 너희에게 잘 해 주는 이들에게만 잘 해 준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그것은 한다. 너희가 도로 받을 가망이 있는 이들에게만 돈을 꾸어준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고스란히 되받을 심산으로 꾸어준다. 그러나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에게 잘 해 주고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어라.

친절하여라. 이는 온유하고 관대하며 상냥한 것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면 너희가 받을 상이 클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가 될 것이다. 그분께서는 은혜를 모르는 자들과 악한 자들에게도 인자하시기 때문이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 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마태오 사도는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 고 말한다. 구약에서의 자비는 인간의 행위이기 보다 하느님의 행위이며, 완전성은 사람들이 다다라야 할 목표이다.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 받지 않을 것이다.

마태오 7: 1-5를 보아라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 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 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 받을 것이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재어서 너의 품에 담아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대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

마태오가 사용하고 있는 ‘되질하다’는 심판기준이다.  그러나 여기 루카 복음서에서는 관대함의 수용력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