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배마실ㆍ은이성지
용인지방 천주교 신앙 공동체의 역사
용인지방에 천주교의 전래가 언제
이루어졌는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다. 다만 첫 신앙 운동이 시작된 (1777 ∼ 1779년) 천진암과 경기도 광주등이 용인과 인접한 거리라는
사실로 보아 다른지역보다 상당히 일찍이 복음이 이루어졌으리라 여겨진다. 첫 박해인 신유년(1801년) 박해 때부터 각지에 흩어진 이곳
용인지방으로 숨어 들었다. 용인지방에는 오래된 전설을 갖고 있는 교우촌으로 사리틔(현 용인시 이동면 서리)에 전해오는 <신부터>,
<붉은 고개>에 관한 이야기와 태화산 중턱에 <성지굴>이 있다. 문헌상으로는 1827년 정해박해 때 경상도 상주 잣골에서
살다가 포교에게 잡혀 진주 감옥에서 1839년 순교한 신태보 베드로가 1815년 을해박해를 피해 경기 용인 지방으로 피신했었다고 증언하고
있으며, 그때 이미 순교자의 2∼3가족이 용인에 거주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전해준다. 이로써 1815년 을해박해 때 이미 용인 지역에 교우촌들이
살았음을 알 수 있다. 용인지방에 알려진 교우촌으로는 은이, 골배마실, 한터, 사리틔, 먹뱅이, 한덕골, 손골, 고초골, 용바위, 모래실 등이
있다.
소년 김대건과 골배마실 성지
김대건의 본관은 김해이고, 증조부는 김진후(金震厚, 비오,
1738~1814)이며, 조부는 김택현(金澤鉉)이다. 부친은 김제준(金濟俊, 이냐시오, 1796~1839) 성인과 모친 고 우르술라의 장남으로
충청도 솔뫼에서 출생하였다. 대건의 아명(兒名)은 재복(再福)이며, 보명(譜名)은 지식(芝植)으로 관명(冠名)은
대건(大建)이다.
김대건의 가문에 처음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분은 증조부 김진후였다. 그는 1791년(신해박해)에 체포되어
1801년(신유박해) 때 유배되었다가 1805년 다시 잡혀 충청도 해미에서 10년간의 옥중 생활중 1814년에 순교하였다. 김대건의 조부
김택현과 가족들은 1827년 경 박해를 피해 충청도 솔뫼에서 용인으로 피신하여 골배마실(한덕동 경유)에 정착하였다. 이 때 소년 김대건의 나이
7세였다.
골배마실이라는 지명은 이곳이 옛날부터 첩첩산중인데다 뱀과 전갈이 많이나오는 곳이라서 뱀마을, 즉 '배마실'이라고 부르던
동네에서 시작되는 산골짜기 안쪽에 있다고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골배마실 성지는 김대건의 소년 시절의 향취가 남아있는 곳이요, 성소의 꿈을 키우던
장소이다. 옛날부터 신자들에 의해 구전으로 김대건 신부의 집터가 있는 장소로 알려져 왔던 이곳은 1961년 양지 본당 5대 정원진 루가 신부에
의해 발굴이 시작되어 돌절구와 갖가지 생활도구, 즉 맷돌, 우물터, 구둘장등을 발견하면서 성지 개발에 착수하게 되었다.
한국인 첫 사제 김대건신부와 은이성지
김대건 신부의 첫 사목활동은 은이 공소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은이는 박해시대 숨어살던 천주교 신자들에 의해 이룩된 교우촌이고, 은이(隱里)라는 말 그대로 '숨겨진 동네', 또는 '숨어 있는 동네'라는
뜻이다. 김대건 신부는 은이 공소를 중심으로 서울, 경기(용인) 지방을 두루 다니며, 사목 활동에 전념하게 된다. 이 은이 공소는 이미 유학
길에 오르기 전, 1836년 나 모방 신부로부터 세례 성사와 첫 영성체, 신학생으로 선발된 곳이기도 하다. 조선 교회 사상 처음 발굴된 성소가
비로소 결실을 맺은 곳이 '은이성지'이다. 이렇게 은이 공소는 김대건 신부에게 있어 첫 사목 지역이었고 조선 천주교회의 역사상 본방인 사제가
사목한 최초의 본당이었다. 이 시기에 김대건 신부는 서울과 경기 지방의 은석골, 텃골, 사리틔, 검은정이, 먹뱅이(묵리), 한덕골, 미리내,
한터, 삼막골, 고초골, 용바위, 단내 등지에 흩어져 있는 교우들을 찾아 성사를 베풀고 사목활동을 전개하였다. 이 당시에 행하신 김대건 신부의
사목활동 모습이 1866년(병인박해) 남한산성에서 순교한 정은 바오로 가문 정 레오 신부에 의해 다음과 같이 전해온다. 김 신부님과 복사가 깊은
밤중에 대문밖 에 오시어 '정생원! 정생원!'하며 증조부 바오로를 소리에 식구들은 모두 잠이 깨었으나 누가 무슨일로 찾는지 두려워 주저하게
된다. 복사가 작은 목소리로 '김 신부님께서 성사주러 오셨으니 주저하지 말고 빨리 나오시오!'하는 말에 깜짝 놀라 일어나 증조부 바오로께서는
이웃이 알까 쉬쉬하며 반가이 신부님을 방으로 뫼시고 곧 성사 받을 준비를 하는데 그 준비는 간단하였다. 벽에 깨끗한 종이를 한 장 붙이고 그
위에 십자가상을 정성되이 건다. 김 신부님께서는 10여명의 고해자들에게 성사를 주시고 다시 배마실(현 용인시 양지면 남곡리 양지성당 소재지)로
가시어 거기서 성사를 주시고 '은이'로 가시면 날이 샌다고 하신다. 이 증언에서 보는바와 같이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험한 산길을 밤으로만
다니면서 사목활동을 하셨다. 이렇게 6개월간의 사목활동을 하시던 중 고(高) 페레올 주교의 명으로 곧이어 조선에 입국하게 될 매스뜨로 신부와
최양업 도마 부제의 입국로를 알아보기 위한 임무가 맡겨진다. 1846년 4월 13일 김대건 신부는 은이 공소에서 교우들과 마지막 미사를 봉헌한
후 교우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씀을 남기셨다. '험난한 때에 우리는 천주님의 인자하심을 믿어 마지막 순간까지 그의 거룩한 이름을 증거할 용맹을
주시기를 간절히 기구합시다. 지금 우리의 주위에는 검은 마귀의 손길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내일의 삶을 모르는 위급한 처지에 처해있는
우리들입니다. 내 마음과 몸을 온전히 천주님의 안배하심에 맡기고 주 성모님께 기구하기를 잊지맙시다. 다행히 우리가 살아가게 된다면 또 다시
반가이 만날 날이 있을 것이오. 그렇지 못하면 천국에서 즐거운 재회(再會)를 합시다. 끝으로 내 홀로 남으신 불쌍한 어머님을 여러 교우분들이 잘
돌보아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체포와 순교의 발자취
선교사의 입국로를 준비하던 김대건 신부와 일행은
뜻하지 않은 사건으로 순위도에서 포졸에게 1846년 6월 5일 체포되어 갖은 고초를 당하게 된다. 해주 감영에 이어 포도청으로 이송된 김대건
신부는 40여 차례의 모진 심문을 당하게 되고, 이 시기에 조정의 대신들에게 서양 학문을 일깨워 주는 활동을 하게 된다. 처형되기 한달 전에는
마지막으로 조선 교우들에게 보내는 '회유문'을 작성하였다. 그 해 9월 15일에 반역죄로 사형 선고를 받고 다음날인 9월 16일에는 새남터에서
군문 효수형으로 순교의 월계관을 받게 된다. 김대건 신부의 시신은 먹뱅이(묵리)에 살던 이민식(빈첸시오)과 몇몇 교우들이 몰래 빼내어 10월
26일에 미리내에 안장하게 된다. 그때부터 교우들은 생전에는 사목활동을 위한 길이오, 순교하신 뒤에는 김대건 신부의 유해를 모셔갔던 이송길을
김대건 신부님의 신앙 열정과 순교 정신을 본받고자 기도하며 순례하기 시작하였고, 은이 성지에서 미리내 성지에 이르기까지 넘어야 할 세 고개를
신덕(信德)고개 (어은이 고개), 망덕(望德)고개 (해실이 고개), 애덕(愛德)고개 (오두재 고개)라 이름지어 부르며 고귀한 김대건 신부님의
순교정신을 기념하는 비가 각각 세워져 있다.
문 의 처 : 양지 성당 (사무실 : 031-338-33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