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가을학기 성서모임 첫째 시간 |
성서는 한마디로 말해 성령의 감도로 기록된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이 성서에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계시해주신 말씀과 우리 신앙의 기본교리가 담겨있습니다. 계시란 '드러내다', '열어 밝히다'라는 뜻으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계시해주셨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자신을 드러내심을 뜻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계시를 하시는 이유는 피조물인 우리의 제한된 사고로는 창조주이신 하느님을 스스로 알 수가 없으므로 하느님 자신이 우리에게 알려주셔야만 그분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서란 하느님께서 피조물인 우리들이 그분을 잘 수 있도록 해주시는 그분이 우리에게 일러주시는 책인 것입니다. 가톨릭 교리서 101항에서 141항에는 성서에 대한 교회의 공식 가르침이 적혀있습니다. 교리서에는 성서를 다음과 같이 정의했습니다. - 101.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당신을 계시하실 때 선하신 자비로 인간의 언어로써 말씀하신다. "영원하신 아버지의 말씀이 연약한 인간의 육신을 취하여 인간들을 닮으셨듯이, 인간의 언어로 표현된 말씀들이 인간의 말과 같아졌기 때문이다." - 134. 성서 전체는 하나의 책이며, 그 하나의 책은 바로 그리스도이십니다. "왜냐하면 성서 전체는 그리스도께 대하여 말하고 있으며, 성서 전체가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서 안에서 성서에 대한 정의를 찾아볼 수도 있습니다. 베드로 후서 1장 21절을 보면 "성서의 예언은 인간의 생각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성령에 이끌려서 하느님께로부터 말씀을 받아 전한 것입니다."라고 되어있습니다. 또한 디모데오 후서 3장 16-17절을 보면 "성경은 전부가 하느님의 계시로 이루어진 책으로서 진리를 가르치고 잘못을 책망하고 허물을 고쳐 주고 올바르게 사는 훈련을 시키는 데 유익한 책입니다. 이 책으로 하느님의 일꾼은 모든 선한 일을 할 수 있는 자격과 준비를 갖추게 됩니다."라고 되어있어 처음에 말씀드린 대로 성서에는 우리 신앙의 기본교리가 담겨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비록 성서가 하느님의 계시를 담고 있다고 할지라도 실제로는 인간의 역사(이스라엘)와 그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느님을 이야기하고 있으며 또한 인간에 의해, 인간의 언어로 쓰여진 것이 성서입니다. 따라서 성서는 하느님의 말씀과 그것을 받아 적은 인간의 말이 함께 공존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로부터 요한묵시록까지의 말씀 가운데에는 하느님께서 직접적으로 하신 말씀도 있지만(예 : 창세기 1,3 "빛이 있으라"), 그 이외에 신약에서는 예수님의 말씀(예 : 마태 5-7장 산상수훈), 성경의 여러 저자(모세, 이사야, 마태, 바울로 등)의 말이 있고(성경 중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며, 신약의 서신은 전적으로 저자만의 말이다), 천사의 말이 있는가 하면(창16:8), 마귀의 말도 있고(마태 4,3), 동물의 말이 있는가 하면(민수기 22,28) 식물의 말도 있습니다(이사야 9,9-15). 그런데 어떻게 해서 성서를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요한복음의 저자는 자신의 책 마지막 부분에, "이 책을 쓴 목적은 다만 사람들이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주님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20,31)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성서는 독자들에게 생명과 죽음, 구원과 멸망이 달려 있는 어떤 중대한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성서를 통해 하느님의 뜻을 전하고, 인간이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길을 제시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로 인해 성서가 비록 인간의 언어로 쓰여졌고 저자의 독단적인 생각이나 잘못된 번역, 틀리게 옮겨 쓴 부분이 성서 안에 포함되어 있을지라도 성서를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서를 신앙인의 눈으로 보지 않고 역사서나 과학서, 아니면 일반적인 문학작품으로 놓고 본다면 성서는 비과학적인, 연대 착오적인, 그러한 책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신·구약성서를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은 본문 가운데의 말이 실제적으로 누구의 말이든지 간에 그것이 기록될 때는 하느님의 영감을 받은 저자에 의하여 기록되었다는 뜻인 것입니다. 2. 성서는 어떻게 구성되어있나요? 구약(舊約)과 신약(新約) 성서는 크게 두 가지로 책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 첫째가 구약성서이며 둘째가 신약성서입니다. 구약에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중심으로 기록된 하느님의 말씀이 적혀있습니다. 그러나 구약의 전체 줄거리는 인류 구원을 위해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메시아, 즉 그리스도에 대한 기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약은 구약에서 약속된 메시아로서 우리에게 오신 그리스도의 행적과 말씀을 기록한 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약과 구약과의 관계 - 신약은 구약의 완성 조금 더 상세히 설명하면 구약성서는 '이스라엘' 민족과 하느님 야훼와의 계약을 중심으로 엮어진 신앙의 역사를 담고 있는 책이며, 신약성서는 세상을 죄와 악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태어난 하느님의 아들의 복음(福音)선포활동과 그를 믿고 따르는 신앙인 공동체의 이야기를 적은 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구약이 하느님과 이스라엘 민족 간에 맺어진 구원의 계약이라면 신약은 새 이스라엘 백성인 그리스도교 신앙인들과 예수 그리스도 사이에, 십자가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사랑과 구원의 약속으로 구약의 완성을 의미합니다. 신약성서에서 구약을 보아야 구약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음 - 사도들은 예수님의 행적에서 구약에서 예언된 구원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인해 구약 전체가 예수님을 향하고 있으며 예수님의 등장을 준비하였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즉 사도들이 구약성서를 읽고 예수에 대한 믿음에 도달한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는 신앙이 그들의 눈을 뜨게 하여 구약을 깨닫게 한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신약성서에서 구약을 보아야만 구약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구약과 신약의 구성 다음 성서공부시간에
좀더 자세히 다뤄지겠지만 성서는 단 한 권의 책이 아니라, 73권(구약
46권; 신약 27권)이라는 적지 않은 양의 책들로 구성되어있습니다. 우선
46권으로 구성된 구약은 다음 도표와 같이 구분되어집니다.
* 가톨릭에서는 이 제2경전을 역사서, 시서, 지혜서, 예언서로 분류하여 해당 분류에 삽입하여 넣었습니다. 개신교에서는 16세기 이후로 제2경전을 외경(外經)이라 여겨 성서에 포함시키지 않으므로 개신교의 구약성서는 가톨릭보다 7권이 모자라는 39권입니다. 정경과 외경의 분류에 대해서는 다음에 좀 더 자세히 다루게 됩니다. 신약성서 27권의 구성은 다음의 도표와 같습니다.
3. 정경과 외경 - 이 책들만이 하느님의 말씀이다. 개신교 신자였던 분이나 개신교 성서를 보신 분들은 그들의 성서 목록이 가톨릭의 것보다 적음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들의 성서는 구약 39권과 신약 27권, 모두 66권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즉 구약의 권수가 7개가 적은 것입니다. 이렇게 차이가 나게된 이유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솔로몬 왕 이후 남북으로 분열된 이스라엘은 국력이 쇠퇴해져 주변 강대국의 침략을 받아 지배를 받게 되었으며 또한 빈번한 유배생활을 했습니다. 나중에 예루살렘 성전이 재건되어 유대인들이 이스라엘 본토로 돌아오게 되었지만 많은 수의 유대인들은 본토로 돌아오지 않고 그리스 문화권에 널리 흩어져 살게 되었습니다. (이들을 '디아스포라'라고 부릅니다.) 이들은 오랜 세월동안 그리스어만 사용하다보니 히브리어를 잊게 되었습니다. 프톨마이오스 2세는 이 사람들을 위해 히브리어 성서를 그리스어로 번역하게 합니다. 이렇게 해서 번역된 성서를 예루살렘의 일흔 명 학자들이 이 번역에 참가했다고 해서 70인역 성서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 70인역 성경에는 히브리어 원문 성경에는 없지만 당시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성서로 여겨 읽고 있었던 토비트서, 유딧서, 지혜서, 집회서, 바룩서, 마카베오 상·하 등 그리스어로 쓰여진 일곱 권의 책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를 제 2경전이라고 부릅니다. 개신교에서는 이 제 2 경전을 위경이라고 부릅니다. 초대교회의 교부들은 4복음서에서 예수님과 제자들이 구약을 인용할 때 이 70인역 성서를 사용했기 때문에 70인역 성서를 가장 권위있는 성서로 여겼으며 여기에 포함되어있는 제2경전 또한 382년 로마 주교회의에서 정경으로 확정시킵니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이 멸망하고 난 90년경 히브리어로 되어있는 39권만을 정경이라고 확정지었습니다. 정경화 과정 세월이 흐르면서 우리가 지금 성서로 여기고 있는 책들 외에 다른 책들이 '하나님의 말씀' 목록에 오르내리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어느 책이 하느님께서 주신 진정한 책이며, 어느 책이 거짓 책인지 구별해야할 필요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에 따라 학자들은 다음의 원리에 의하여 '거룩한 책'들을 선별하여 정경으로 확정지었습니다. a.
유일신 하느님만을 경배하라고 가르치고 있는가? 가톨릭에서 제2경전을 추가로 인정, 아니면 개신교에서 제2경전을 삭제? 한편 16세기 루터에 의한 종교 분리 이후 개신교는 70인역 성서에서 제 2경전을 제외한 39권만을 인정하였는데 그 표면적인 이유는 당시 유다인들이 70인역 성서 중 히브리어에서 번역한 39권만을 정경으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5세기부터 16세기에 이르기까지는 예로니모 성인에 의해 라틴어로 번역된 불가타 성서가 가톨릭 교회의 공식 성서로 인정되어 있었는데 이 불가타 성서에도 제2경전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개신교인들이 원수처럼 여기고 있던 유대인들의 정경목록을 따르고자 한 것에는 숨은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연옥교리가 제 2경전인 마카베오서에 근거하기 때문입니다. 연옥교리를 부인하기 위해서는 제2경전을 정경목록에서 제외시켜야만 하는데 마침 유다인들은 제2경전을 정경으로 여기지 않고 있기에 유다인들의 정경목록을 따른다고 한 것입니다. 가톨릭 교회에서는 신자들이 개신교의 이러한 주장에 흔들리지 않게 하기 위해 트렌체 공의회(1546년)에서 382년 로마 주교회의가 확정한 정경 목록을 재차 확인합니다. 개신교에서는 마치 가톨릭 교회가 그 때까지는 성서에 없던 제 2경전을 트렌체 공의회에서 더한 것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가톨릭만 옳을까? '오직 성서'를 주장하는 개신교에 대항이라도 하듯 1546년 교황 비오 6세는 그 때까지 번역된 자국어 성서를 읽게 될 경우 반드시 주교의 허락을 받을 것을 명하였으며, 그 이후로는 여타의 자국어 성서 번역을 금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교사들이 가는 곳마다 성서의 자국어 번역은 불가피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듀에이 역본(영국), 네델란드 역본, 프랑스어 역본, 독일어 역본, 이탈리아어 역본들이 많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이에 1893년 교황 레오 13세는 종교 분리에 대한 반작용으로 성서를 교도권 하에 묶어 놓았던 것을 반성하면서 교서 '하느님의 섭리(Providentissimus Deus)'를 통해 교회 내에서의 성서 연구를 권장하였으며 1889년 대사를 베풀면서 신자들로 하여금 성서 읽기를 권장하였습니다. 그리고 교황 비오 12세는 1920년 예로니모 축일에 교서 '보호자이신 성령'을 통해 각 가정마다 4복음서와 사도행전을 갖추도록 권고하였습니다. 가톨릭에서는 성서를 읽지 못하게 한다고 말하는 개신교인들의 주장이 얼마 전까지는 그다지 틀린 말이 아닌 것이었습니다. 4. 성서의 장(章)과 절(節) 표시 - 성서는 처음부터 장과 절로 나누어져 있었나요? 성서는 처음부터 몇 장, 몇 절로 나누어 쓴 것이 아닙니다. 성서가 씌어진 한참 뒤에 읽기 쉽게 하기 위해 후세의 사람들이 '장'과 '절'로 나눈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미 1-2세기 경부터 회당에서 읽으려는 목적으로 율법서는 '파라쇼트'(Parasot)라는 단위로, 예언서를 소위 '합타로트'(haptarot)라는 단위로 대략 구분하였습니다. 또한 그들은 거의 현재의 절(節)에 상응하는 '프슈컴'(psuqim)이라는 소규모의 단위로 구약성서를 구분하였습니다. 그리스도교 성서의 장의 구분은 13세기부터 시작되었는데 두 가지 설이 있습니다. 어떤 주장은 카로의 위고 추기경에 의해 이루어졌다고도 하며 또 다른 학자들은 캔터베리의 대주교 랭턴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성서가 절로 나뉘게 된 것은 불가타역에는 일찍이 1558년에 절들이 표시되었는데, 구약의 절들은 유대인들의 히브리어 성서에서 하고 있던 나눔법에 기초했으며, 신약에 있어서는 로버트 스티븐스(R. Stephens)에 의해 1551년판 그리스어 성서에 처음으로 절이 등장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서를 공부하시다 보면 장, 절의 나눔이 본문의 내용과 맞지 않는 곳도 있고, 엉뚱한 곳에서 장이 바뀌는 것을 자주 목격하시게 될 것입니다. 장절의 표시는 인간의 편의를 위해 인간이 만들어놓은 것이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5. 성서 원본의 언어 성서의 원문에 쓰여진 언어는 구약성서의 대부분이 히브리어로 씌어졌습니다. 히브리어는 22개의 자음으로만 표기되므로 읽을 때에는 그 단어의 뜻에 따라서 모음을 붙여서 읽는다고 합니다. 때문에 같은 단어를 달리 발음하기도 하고 다른 뜻으로 알아듣기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야훼라 부르는데 개신교에서는 여호와라고 달리 부르는 원인이 여기에 생긴 것입니다. 이에 6-7세기 경에 유대 학자들이 모여서 성서 본문의 뜻을 고정시키고, 모음 기호를 발명하여 자음 아래, 위, 안에 붙였습니다. 이 작업을 한 학자들을 '마소라 학자'라 부르고, 그들이 펴놓은 성서본문을 '마소렛 원전'이라고 합니다. 구약성서 중 일부는 히브리어의 방언이라고 불리는 아라메아어로 집필되었습니다. 아라메아어는 셈족 언어에 속하는 것으로 시리아 사막의 유목민들이 쓰던 언어로 추정됩니다. 본래 히브리어는 이 아라메아어에서 파생된 것으로 유배 이후에 변형, 발전된 것으로 봅니다. 이 외에도 구약성서 중 몇 권(특히 제2경전)은 그리스어로 쓰여졌습니다. 신약성서는 전부가 그리스어로 씌어졌습니다. 70인역과 신약성서에 사용된 그리스어는 B.C. 330 - A.D.330 년 사이에 희랍 문화권에서 통용되던 코이네(Koine) 그리스어였습니다. 그런데 성서의 그리스어는 '코이네'이면서도 독특한 면이 있으므로 이를 '성서 희랍어'라고 한다. 성서 희랍어는 히브리어, 아라메아어, 70인역 성서 등의 영향을 받았고, 독창적인 의미와 사상을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6. 성서 원본과 번역본 기원 전 10세기부터 문서의 형식으로 작성되기 시작했다고 추정되는 구약성서를 제쳐놓고서라도 신약성서의 원문 역시 발견할 수 없다고 합니다. 우리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성서는 모두 원본을 손으로 복사한 사본을 번역한 것입니다. 현재 존재하고 있는 가장 오래된 사본일지라도 원본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원서의 본문이 훼손될 수 있는 네 가지 경우들 1) 본문을
베껴 기록하는 사람이 같거나 비슷한 두 낱말을 실수로 중복된 것으로
생각하고 그중 하나를 삭제하는 경우. 단지 원본을 그대로 필사하는 것만으로도 원본을 그대로 간직할 수 없다고 하는데 그것을 다른 나라말로 번역할 때에는 더 많은 훼손이 따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이유로 인해 성서본문 중 한 구절이 이해가 되지 않을 때에는 다른 번역본에는 어떻게 되어있나 비교해보는 것도 큰 도움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나라의 성서 번역 우리나라에서는 전례용, 신자용, 교회일치용 순서로 성서번역이 진행되었습니다. 전례용 성서로 역관 최창현이 1790년과 1800년 사이에 연중 주일과 축일 때 읽혀지던 4복음서의 성경구절을 발췌하고 해석을 붙인 한문본 '聖經廣益'과 '聖經直解'를 재편집하여 한글로 옮겼다고 전해집니다. 이것이 필사본 '성경직해광익'이며 우리말로 옮겨진 최초의 하느님 말씀입니다. 최창현에 의해 '성경직해'가 번역되었는데 처음에는 필사되다가 1892년부터 5년 동안 전질 9권으로 간행되었고 1940년까지 5판을 거듭하였습니다. 1910년에는 한기근 신부에 의해 신자들을 위해 4복음서가 '사사성경(四史聖經)'이라는 이름으로 번역되어 나왔습니다. 또한 1922년 한기근 신부에 의해 사도행전이 '종도행전'이라는 이름으로 간행되었으며 1941년 덕원 분도회 수도원에서 슐라이케르 신부에 의해 '서간·묵시록'이 번역되어 신약성서가 완역되기에 이르렀습니다. 구약성서의 번역은 신약보다 늦은 1958년 선종완 신부에 의해 시도되어 1963년에 가서야 46권 중 17권이 9개의 책으로 간행되었습니다. 개신교측에서는 1882년 만주에서 스코틀랜드 연합장로교회 소속 로스, 멕킨타이어와 의주 청년들과 함께 '예수성교 누가복음전서'를 내기 시작하여 1887년에는 '신약전서'를 출간했습니다. 1911년에는 구약전서를 완역 출간하였으며 1938년 '성경 개역'이 간행되었는데 이것이 신구약 개역성서의 초판으로 2단 종서의 배열과 옛날 철자법을 쓰고 있는데 현재까지도 개신교 예배에서 사용되고 있는 공식 성서입니다. 본문이 시적이나 옛날 문체를 쓰고 있어 그 뜻을 쉽게 파악할 수 없는 결점이 있습니다. 가톨릭과 개신교 교회일치운동의 일환으로 1968년 성서공동번역위원회가 조직되고 번역에 착수하여 1971년 신약성서를, 1977년에는 구약성서까지 완역하여 '공동번역 성서'를 간행하게 되었습니다. 가톨릭과 개신교가 함께 민중이 알기 쉬운 언어로 성서를 새롭게 옮겼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고 볼 수 있는데 개신교에서는 제2경전이 포함되어있다는 이유를 들어 잘 사용하고 있지 않습니다. 직역이라기 보다는 본문을 쉽게 설명한 의역 성서이기 때문에 원래의 뜻을 상실한 곳이 종종 발견되고 합니다. 현재 가톨릭에서는 구약에 대해 각 권마다 개요와 본문 주석이 포함된 새 번역 성서를 발간했으며, 신약은 200주년 주해성서가 발간되어 있습니다. 7. 성서를 읽는 방법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수많은 책을 읽어왔지만 하느님의 말씀인 성서를 읽는 데는 몇 가지 주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ㄱ. 머리로 읽어야 합니다. 즉 성서를 읽고 이해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머리로 이해하지 못하면서 성서로부터 어떤 은총을 얻고자 함은 진실로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서를 읽다 어느 한 구절의 진위가 의심이 될 때에는 그 구절의 진위에 얽매이지 말고 그 구절이 전체의 맥락에서 하는 역할을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다윗의 부정행위에 대한 상세한 묘사는(사무엘 하 11장) 잘못을 저지를 수 있는 나약한 인간 현실을 그대로 드러냄과 동시에 죄를 멀리하라는 교훈을 주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성서의 부분적 표현 내용보다는 전체적인 흐름 안에서 부분을 파악해야 합니다. 또한 '어떻게'가 아닌 '왜'의 관점에서 하느님의 섭리를 이해하려고 해야 합니다. 즉 '어떻게 빵 5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000명을 먹이셨을까?'가 아닌 '왜 이러한 기적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을까?'를 깨달으려 해야 합니다. 특히 반복하여 주시는 말씀과 성서본문에 나타나는 하느님과 등장인물과 그 역할에 대해서 알아봅니다. 믿음의 선조인 아브라함과 하느님과의 대화를 통해 인류 구원에 대한 하느님의 약속이 이루어짐을 깨달아야 합니다. 각 장마다 요점을 정리하면서 깨달은 바와 이해하지 못한 부분을 기록해 두는 것도 많은 도움이 됩니다. ㄴ. 가슴으로 읽어야 합니다. 머리로 읽는 것과 마음으로 읽는 것은 차이가 있습니다. 머리로 이해한 것은 쉽게 잊어버릴 수 있습니다만 가슴으로 읽은 것은 가슴 깊이 담아두어 쉽사리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성서를 읽을 때 가슴에 와 닿는 부분이 있으면 바로 그 말씀을 통해 하느님께서 나를 만나고자 하시는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바로 그 때 하느님과의 대화가 이루어지며 하느님과 나 사이의 관계가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ㄷ. 몸으로 읽어야 한다. 성서는 눈으로 읽어서 머리로 생각하고 마음에 새겨두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생활하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행동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하였듯이 하느님의 말씀이 항상 살아있고 힘이 있지만(히브리 4,12) 실천하지 않는 사람 안에서는 그 생명력이 사라지고 말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실행할 때 우리는 성서를 몸으로 읽은 것이 됩니다. 매일 성서를 읽기 위해서 매일 일정한 시간을 마련하여 성서를 읽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루에 15분만 할애해도 1년 안에 신구약 성서 전체를 통독할 수 있는 것이지만, 이를 실천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한 성서의 의미와 가치를 깨닫고 매일 성서 읽기를 결심하고 시작하더라도 며칠 안 가서 손을 놓고 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를 깨달아 바로 잡아야만 매일 성서 읽기를 성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서 읽기가 되지 않는 첫째 원인 무엇보다도 먼저 매일 성서 일기가 어려운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독서를 싫어하는데 그 원인이 있을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학교를 졸업하고 나면 책하고는 담을 쌓고 살아갑니다. 그러니 방대한 분량의 성서를 어찌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나갈 수 있겠는지요. 성서 읽기가 되지 않는 둘째 원인 그 다음 원인은 우리 신앙인들이 성서를 읽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교회가 주일미사처럼 성서 읽기를 의무화시킨 적도 없고, 또 신앙의 기본교리를 대강 알고 있는데 굳이 성서를 또 읽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점들 때문에 일반적으로 우리 가톨릭 교인들이 성서 읽기를 게을리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나누기: 1. 시라큐스에 오기 전 성서공부를 해본 적이 있는지? 본인에게 가장 효과적이었던 성경공부 방식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2. 본인에게 성서 읽기가 잘 안 되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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