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차례로] [다음]

제14과 한국 교회사
1. 천주교가 전래되기 전의 조선
천주교가 이 땅에 전래되기 이전의 조선 후기(18세기 말엽)는 극심한 당파싸움으로 불안이 그치지 않던 시기였습니다. 또한 유교의 한 갈래라 볼 수 있는 성리학이 그 당시 조선 왕조의 정치 문화 사회 전반을 이끌어가고 있었으나 그것이 갖는 모순으로 인하여 회의를 품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그리고 당시의 계급차별(양반 중인 상인)이 심화하여 구조적 변화를 갈망하는 많은 요구와 움직임이 일게되었습니다.
더불어 매해 거듭되는 기근과 전염병으로인 한 사회병폐의 악순환이 계속되고, 시대적 요구로서 천주교가 사람들 사이에 점차 부각되었고 급속한 발전을 보게 되었습니다. 당시 중국에 보내진 외교사절단을 통하여'천주실의'등의 천주교 교리서가 들어와 실학파들과 남인계 학자들
사이에 널리 읽혀지게 되었습니다. 학문적 호기심으로 연구되던 천주학은 천진암과 주어사의 연구모임인 '강학회'를 통해 신앙적 실천운동으로 발전하게 되었고 마침내 이벽, 정약용, 권철신, 권일신등은 천주교에 대한 지식의 폭을 넓히고 본격적인 신앙생활을 위해 이승훈을 북경에 보내게 되었습니다.

2. 교회의 창설(1784년)
1784년, 이승훈이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많은 교리서와 성서 그리고 성물을 가지고 귀국한 후 뒤이어 이벽 등이 영세 입교하였고, 서울의 명례방에서 정기적인 종교집회를 마련함으로써 한국 최초의 신앙공동체가 형성되면서 한국 교회가 탄생되었습니다.

지금까지 단 한 사람의 전교 신부조차 찾아간 일이 없었던 아시아의 한 왕국에 복음을 심기
위해 하느님은 기적적으로 한국교회를 창설한 것입니다.
이처럼 한국교회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우리민족 스스로의 깨우침으로 천주교 교리를 받아들여 신앙의 싹을 틔었고, 평신도가 주축이 되어 오랜 박해의 기간 동안 신앙을 증거하고 키워 왔던 자랑스런 전통을 가지게 되었다.

3. 주문모 신부의 입국
초기의 신자들은 명동성당 자리에 있던 김범우의 집에 모여 기도하며 집회를 갖고 전교에 박차를 가했으나 교회의 지도자들이 추조(형조)의 관헌에게 적발됨으로써(울사추조적발사건) 이중, 집주인인 김 범우는 자신의 믿음을 굽히지 않아 한국교회의 첫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1786년 신자들은 아직 성직자가 없었으므로 임의로 북경 교회를 본떠 소위 가성직제도를 만들어 2년 동안 주일 미사를 거행하고 세례 견진 고해 성사 등을 베풀었습니다.
물론 이는 잘못된 교리 해석의 결과로서 1789년까지 계속되다가 북경 주교에게 문의한 후 시정하기에 이릅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1794년 이땅에 처음으로 성직자가 들어오게 됩니다.
조선 교우들의 피나는 성직자 영입운동이 그 결실을 맺게 된 것입니다. 참으로 눈물겹도록 감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주문모 신부가 들어와서 신자 수가 급격하게 증가하게 되자 위기를 느낀 조선 왕조는 체포령을 내렸습니다. 이 무렵 여회장 강완숙은 주 신부를 나무 광에 숨겨 보호하는 등 모진 박해와 시련 속에서도 꾸준히 전교는 계속되어 나갔습니다.

4. 박해
천주교가 이 땅에서 박해를 받게 된 것은 사상적으로 유교의 신분 사상과 천주교의 평등사상이 갈등을 빚었고, 사회적으로는 조상 제사를 미신으로 간주하여 이를 거부함으로써 질서와 가치관을 파괴한다는 우려를 주었으며 정치적으로는 당파싸움에 천주교를 이용했기 때문입니다. 1784년에 창립된 한국 교회는 이듬해 명래방(지금의 명동)에 있던 김범우 집에서 집회를 하다가 관헌에게 발각되어 일행이 잡혀가고 교회 서적, 성물, 성화 등을 압수 당했습니다. 이때 김범우가 유배지에서 사망(최초의 순교)했으며, 다른 사람들의 신앙 생활도 심각한 타격을 받았습니다. (을사추조적발사건)계속되는 박해에도 불구하고 권철신, 정약종, 등에 의해 교세가 확장되었으며, 1795년 주문모 신부가 입국한 후 신자들이 1만 명으로 급격히 늘어났습니다. 그러나
순조 즉위후인 1801년 당파 싸움의 와중에 권철신, 정약종, 이승훈을 비롯한 천주교 신자 300여명과 주문모신부가 순교하였습니다(신유박해).
1836년 샤스탕 신부와 앵베르 주교의 입국으로 모처럼 활기를 찾게된 교회는 외국인 성직자가 입국했다는 소문이 퍼져 다시 모진 박해를 받았습니다. 1839년 정부는 '척사윤음'을 반포하고 세 명의 성직자와 정하상을 비롯한 신자 200여명을 처형하였습니다(기해 박해).
철종 즉위후 십여년 동안 박해가 뜸하게 되고 최양업 신부와 열두명의 프랑스 선교사의 노력으로 신자 수가 2만3천명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고종이 즉위하자 홍선 대원군은 자신의 집권을 확고히 하기 위해 대대적인 박해를 가했습니다. 1866년 아홉 명의 성직자와 만여 명의 신자들이 순교하였습니다(병인박해).
쇄국정책을 펴오던 조선은 1876년 병자수호조약으로 문호를 개방하기 시작했고, 1866년 한불통상조약으로 완전한 신앙의 자유를 보장하였습니다.

*척사윤음이란 천주교를 사학(邪學)으로 단정, 그를 배척하기 위해 임금이 내리던 윤음 즉,
임금의 말씀입니다.

5.신자들의 신심(信心) 생활
조선시대는 천주교를 사교(邪交)로 단정하였기 때문에 이 사교를 뿌리째 뽑는 것이 나라의
정책이었으며 천주교에 관계되는 것은 모두 죽음을 의미했습니다. 천주교 교리를 배우고 세례를 받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한국 초대 교회 신자들은 이 사실을
잘 알면서도 믿음을 받아들였고 언제나 순교할 각오를 하며 살았습니다.
신자들은 단 한번의 성사(聖事)를 위해 평생 사제를 기다리는 인내가 필요했으며, 단 한번의
미사참례를 위해 수 백리 험한 산길을 걸어서 갔고 한밤중에야 비밀리에 미사 참례를 했습니다.
박해시대에는 깊은 산 속에 교우촌을 형성하며 살았습니다. 이런 한 교우 촌은 비록 물질의 궁핍 속에서 가난과 굶주림에 시달렸으며 그들끼리 아침 저녁 함께 기도하고, 같은 생업에 종사하며 서로 돕고 사는 모습이 마치 사도행전(2,44-47, 4,32-37)에 나오는 초대교회 공동체를 배웠고 구하기 힘든 한글 서적을 통하여 스스로 교리 공부를 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모든 정성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생명의 양식을 받아들이는 마음가짐으로 교리를 접했으며 그 만큼 열심히 공부를 했던 것입니다. 이런 정성과 노력으로 그들이 본래 처해있던 무지(無知)조차도 극복하고 하느님 말씀의 진미(眞美)를 깨닫는 지혜를 터득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의 교리는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살아있는 진리, 생명의 말씀이었습니다.
특히 200년전, 이 땅에 복음의 전래가 선교사 없이 이룩되었다는 사실과 1801년의 큰 박해 이후에 성직자가 한 분도 안 계셨던 30여년을 신자들은 쫓기고 숨어살아야만 했던 그 어려운 처지에서도 서로 도우며 믿음을 살리고 이웃에게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
임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선명하게 감지할 수 있습니다.


위로~